세상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마5장 13-16절 20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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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마5장 13-16절 2012.9,162018-12-03T19:51: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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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제일 큰 궁궐은 중국의 자금성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99개의 문을 지나가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수면을 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침실만 99개의 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 속 깊이 들어가야 소통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닫힌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설교 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말씀 듣는 시간을 예배 순서 중의 한 순서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소중한 영혼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는 시간으로 아시고 마음속 깊이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11월 4일은 제2차 총동원전도행사인 ‘D3행복축제’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행사를 ‘행복한 소통’이라는 주제로 진행하기 때문에 첫 번 째는 자신과의 소통에 대하여, 두 번 째는 이웃과의 소통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세상과의 소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의 소통에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과 소통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통’이라는 말은 다 알고 있습니다.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 것입니다. 즉 세상과 소통하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여 그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세상과 소통을 해야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육신을 가졌기에 이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개구리가 물에서도 살고 땅에서도 살듯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양서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요구와 하나님 나라의 요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는 기본적으로 의식주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해결되면 다음으로 명예와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누가 힘을 더 가질 것인가를 가지고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통치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소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세상과의 소통에 본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친히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과 소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것은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과 소통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세상과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세상과 소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으로 가서 그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의 소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은 준엄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로,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려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통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일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적인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 존 나이스빗, 피터 드러커 등이 21세기를 예언했습니다. 21세기의 특징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피라미드조직에서 네트워크 조직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즉 위아래의 관계에서 수평의 관계로 세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위아래의 관계에서는 명령만 있고 소통이 없습니다. 반면에 수평의 관계에서는 명령은 없고 소통만 있습니다. 21세기가 바로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수평관계로 전환하여 소통을 중시한 기업들은 다 살아났지만 대처하지 못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기업은 다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면 기업만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가운데 있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여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의 아이들의 말로 하면 왕따가 됩니다.

    기성세대는 요즈음 아이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그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코스코 정양준 회장은 소통을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의 소통을 포기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자세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사회구원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오직 예배, 기도, 전도, 교회봉사에만 열중하지 사회문제, 역사문제, 정치문제. 경제 문제 등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개인의 영혼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에 관심을 가지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데 주로 관심을 쏟습니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 군부독재시절에 독재에 항거하였습니다. 셋째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이들은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건강한 교회들은 모두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손자 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과의 소통에 성공하려면 세상 사람들을 좀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안티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기독교를 더 이상 자정 능력이 없는 사회악이며 박멸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기독교 관련 기사 댓글에 ‘개독교, 먹사, 개들처럼 더러운 집단, 개과천선해야 할 집단, 독사 같은 놈들’ 등과 같이 거칠은 단어를 사용하며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할까요? 이유가 많지만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기독교가 타 종교에 없는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는 이성적이고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쉽게 먹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저에게 전도할 때에 이것을 믿을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2)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오류를 범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성경을 근거로 수많은 악을 범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카톨릭 교황청은 천동설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단죄했습니다. 중세시대에 카톨릭이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까? 3)기독교가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권력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동안 많은 교회들이 군부독재시절에 핍박 받는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압제하는 권력자의 편에 섰습니다. 또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진보세력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기존정권의 시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한기총이 세상 정치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습니다. 4)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보다 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십일조를 비롯하여 많은 돈을 모아들이지만 3%정도의 예산만 이웃을 위해 구제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목사들의 배만 채우는데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술과 담배는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포용하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전도하는 행위, 개천절에 마니산에 올라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행위, 절에 가서 땅 밟기를 하는 행위,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행위 등은 과거 십자군 전쟁이나 인디언 학살과 비견되는 잔인한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안티기독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비판에 대하여 선별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대답하면 됩니다. 교리적인 부분은 그들이 믿지를 못하는데서 기인하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설득해야 합니다. 둘째로, 조상들의 실수나 기독교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신하여 사과해야 합니다. 셋째로, 삶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인정하고 변명이나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둘째로, 그들과 다른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 왜 안티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과 다른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비판해도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감동시킬만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는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학자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로, 콘스탄티누스1세가 막센티우스 군대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로마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와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는 구절을 보고, 방패에 십자가를 그린 후 진격하여 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듬해인 313년에 자유신교령을 선포했고, 결국 381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기독도들의 삶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 자신은 타락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의 며느리를 구할 때는 정결하고 깨끗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 중에는 그런 며느리를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로마의 귀족사회를 변화시킴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후 유일하게 이교 부흥을 꿈꿨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옛 종교의 부활을 꿈꾸는 이교의 제사장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말을 많이 사용했는지 아십니까? “기독교를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로마가 전쟁으로 시달리던 때, 백성을 구하기 위해 생필품을 전달해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가장 적합한 자로 지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사도행전 2장 44-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모이지만 않았습니다.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누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서로 나누고, 베풀어주는 삶이 있어야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는 콩도 나누어 먹는 좋은 풍습이 있습니다. 손을 펼 때에 세상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우리에게 닫혔던 마음을 열어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의 중심에 서서 그들을 리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동독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주도한 평화적인 촛불행진이라고 합니다. 이 촛불행진은 ‘성니콜라이교회’ 평화적으로 촛불시위를 시작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은 기도회를 마친 후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어두운 밤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몇 십 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몇 백 명, 몇 천 명, 몇 만 명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거의 도시 인구 전체에 해당하는 50만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동베를린의 시민들도 백만 명 이상이 모여 시가를 돌며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벌였습니다.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제지를 했지만 거대한 평화의 행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베를린 장벽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라이프치히 시가에 거대한 현수막이 걸렸는데 거기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교회에 감사하노라.”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자 세상을 바꾸어 놓고 세상으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된 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소통할 이유를 알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폭이 작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딜 때에 세상과의 소통은 그만큼 더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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