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두 이름의 의미를 들여다보다 마 1:21-25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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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두 이름의 의미를 들여다보다 마 1:21-25 2015.12.252018-12-03T23:00:2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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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 설교는 간단히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저의 지론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설교가 짧지만 오늘은 더욱 더 간결하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기독교 중 모든 개신교와 카톨릭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매년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일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이유는 동방정교는 태음력 즉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지만 서방교회는 태양력 즉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기독교도는 1년에 한번은 반드시 성탄절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과 함께 기독교 3대 명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이 성경적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례식에는 성찬식과 세례식이 있습니다. 성찬식은 떡과 잔을 나눔으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고, 세례식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에게 거듭난 증표로 베푸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교회들이 성찬식과 세례식을 합니까? 성경이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성탄절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 경배를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우리도 동방박사처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은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실 것을 보여준 것이지,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교회생활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는 단지 기독교 초기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찬을 베풀고 세례를 주었지만 성탄절을 지켰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탄절은 주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성탄절을 기독교 3대 명절로 지키고 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성경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절기가 아니라 전통종교와 혼합된 절기입니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중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농경신인 사투른(Saturn)과 태양신인 미트라(Mitra)를 숭배하는 축제가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자 로마교회가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통적인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로 정하여 성탄절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성탄절이 성경적인 근거에 기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탄절예배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버이날을 지키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가 왜 어버이날을 지킵니까? 평소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날만이라도 부모님께 효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성탄절만이라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그분 뜻대로 살 것을 결단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성탄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두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에는 여호와는 구원자이시라는 뜻의 ‘예수’와, 22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저는 오늘 이 두 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성탄절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라는 이름 외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더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나 ‘임마누엘’은 모두 이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예수’ 외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또 주셨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개인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더해진 것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더해진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이라고 믿는 곳은 오직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유대교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별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슬람교가 우리와 같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알라고 우리는 믿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기독교 대표적인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도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일 수 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될 정도로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걱정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오늘 성탄절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후로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왜 ‘예수’라는 이름은 사용하지만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와 임마누엘은 한 사람에 대한 두 이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예수’라는 이름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라는 이름만 사용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번 성탄절 설교를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예수라는 이름만 사용하지 말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듯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자주 임마누엘을 부르라고 …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주장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마저도 ‘예수’라는 이름만 사용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24-25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요셉도 예수라는 이름만 불렀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요셉은 두 개의 이름이 있는 데 하나만 사용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지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21절을 읽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습니까? 예수께서 탄생하시기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알려주었고 예수께서 탄생하시자 요셉이 그이름을 불렀습니다.
    반면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습니까? 22-23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예수와 전혀 다릅니다. 임마누엘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본서의 저자인 마태가 예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탄생하신 분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보통 이름처럼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이름을 예수님께 주셨습니까? 그것은 종전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알리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멀리 하늘보좌에 앉아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미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과 관련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다 버리시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도 자신을 희생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성탄예배를 드리지만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고 복만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성탄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성탄은 단지 아기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이 아니라 우리처럼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신 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을 낮추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성탄예배를 드려도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다른 지체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못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은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한 달에 한번 우리보다 못 사는 동남아시아로 갑니까? 성탄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을 맞이하여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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