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꼭 받아야 합니다. 요7:37-39 20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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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꼭 받아야 합니다. 요7:37-39 2013.3.32018-12-03T20:23: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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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사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만큼 많은 갈등과 분열을 가져다 준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한동안 이 문제로 한국교회가 양분되어 오순절계통의 순복음교단과 장로교단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어느 정도 조정이 되어서 순복음교단이나 장로교단이나 별 차이가 없어지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드리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성령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매년 세 번 즉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을 맞이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부자들은 마차를 타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은 당나귀와 낙타를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주간 정도 걸어서 갑니다. 그래서 세 절기를 시작할 때면 항상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큰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명절 끝날이란 어느 절기를 가리킬까요? 그것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초막절 절기에 성전에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와서 번제단의 주위를 돌고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수반에 붓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붓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생수가 펑펑 솟아 나와서 많은 사람과 가축이 물을 마셨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들에게 이런 생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초막절에 물을 퍼다가 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길어다가 붓는 것은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 최고의 절정에 합니다. 예수께서 제사장이 이렇게 수반에 물을 붓는 것을 보시고서 외치신 말씀이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외치셨습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구약시대에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에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반석을 쳤다는 것은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즉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나와 마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와 ‘성령으로’는 모두 성령의 감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모심으로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것을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든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성령을 일회적으로 받는지 지속적으로 받는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 쪽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다른 쪽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주장이 맞을까요?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언제 사용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구원을 받기 전에 사용하지 않고 이미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계속해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일회적으로 받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은 전적인 성령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취임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1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자녀가 된 자들은 계속해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본 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자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또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하자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또 성경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이미 구원을 받아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령님과 굿바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성령과 굿바이를 하면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해 집니다. 이것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은 빵이지만 맛이 없기 때문에 진빵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물론 성령충만을 받지 않아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답게는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것은 성령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찬송하고 헌금을 드리고 설교를 듣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없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성령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자아 중심적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으로 바뀝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점점 썩어가고 있지만 더 썩지 말게 하고 세상이 더 어두워가고 있지만 빛을 비추어 어둡지 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이 세상을 비추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면 됩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즉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분이 바뀌었다고 자동적으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위해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차가 있어도 기름을 넣지 않으면 차를 움직일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름을 넣지 않으면 단지 구경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일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자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계집종의 물음에 벌벌 떨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자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요즘 기독서적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 ‘철인’입니다. 그 책은 다니엘 김선교사의 신앙과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10년 한국, 10년 일본, 10년 미국에 가서 살은 다국적 경험과 언어 구사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십대 시절 5년간 일본 후쿠오카 거리에서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서양인도 버겁다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4학년 때에 전교생의 신앙을 지도하는 종교대장이 되었습니다.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남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지금은 위험한 지역으로 가서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철인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지속적으로 성령을 받아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은 중국 지하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윈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책을 보면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내용이 나옵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기독교가 다 무너진 것 같은 때였습니다. 마치 엘리야시대에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것 같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윈 형제가 16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핍박이 극도로 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책을 보고 싶어도 구경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성경책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백일동안이나 작정을 하고 기도했습니다. 얼마간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안 주셔도 좋으니까 딱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백일기도가 딱 끝나는 날 집 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자 윈 형제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어서 모두 다 외워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중국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윈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답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물을 마십니까? 목마른 자입니다. 누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여 명의 성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사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초에 있는 갈릴리교회로부터 3번이나 집회 초청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집회는 양육부흥회가 아니라 전도부흥회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도에 관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도는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마음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항상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을까?” 이 질문을 계속 떠올리며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를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종아, 네가 왜 항상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지 아느냐?” 귀가 솔깃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성령을 계속해서 사모하지 않고 행사용으로만 구하기 때문이다.” 순간 죄송스러웠지만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늘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을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성령을 구합니다. 때로는 전도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해 성령을 구합니다. 때로는 영적인 은사를 받기 위해 성령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한 후에는 생각과 마음에서 성령을 없애 버립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사용으로만 성령을 구하고 지속적으로 성령을 구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곧 삼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우리는 주로 어떤 것을 보고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잘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거나, 불치병에 걸려서 치료를 할 수 없거나,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주로 외적으로 드러난 고통을 보고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주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노아시대가 홍수로 심판을 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변화가 없고, 비신자들을 봐도 입한 번 벙긋하지 못하는 무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성령을 받아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남녀 종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사모하여 성령을 받고 삶의 변화와 능력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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