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을 받았다면 행 2장 5-13절 2018.10.14

//성령충만을 받았다면 행 2장 5-13절 2018.10.14
성령충만을 받았다면 행 2장 5-13절 2018.10.142018-12-03T23:57:4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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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행 2:5-13절 2018.10.15.
    지난주에 오순절에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며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 이런 현상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04편 4절과 히브리서 1장 7절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불과 바람을 대동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단순히 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했을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을 함께 읽습니다.“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본문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전 세계에 흩어져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렀을까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셔서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자 그들을 세계 곳곳에서 흩어져 살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너희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출 23: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매년 세 번,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절기를 지키려고 천하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어떤 일을 일어났습니까? 6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당시 그곳에는 약 15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자 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제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의 언어로 말하므로 15개국 사람들과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15개 국어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기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각 나라 말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 너머에 소통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은 서로 소통하게 하는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소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원수였던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었듯이, 미워하던 자들을 용서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자신은 성령충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꽉 막혀 있다면 이는 성령충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15개국의 언어로 각각 들리자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6-8절을 함께 읽습니다.“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15개 국어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이성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모신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저렇게 살아갈 수 있지?”라고 의문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 신비의 대상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런 천하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각각 난 곳 방언으로 듣는 일이 일어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4장 47-48절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한 마디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시작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순절 방언사건이 단지 기적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임을 알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재림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귀에 각국의 언어로 들린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9-11절입니다. 우리는 바대인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비리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때에 그들의 귀에 들린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큰일’입니다.‘하나님의 큰일’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자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다는 것은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성령충만을 받으면 무엇보다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요 15:26).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있다면 이는 곧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모여든 무리들이 각국의 언어로 복음을 듣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들이 복음을 듣고 그들이 보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아해 하며 깜짝 놀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한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배우지 않았지만 15개국 말로 복음을 전하는 기적을 보았어도 즉시 예수님을 믿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기적이나 표적을 동해 복음을 전할지라도 사람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지라도 즉시 상대방이 즉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거듭나는 과정에서 먼저 금식을 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제가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그들은 자기 민족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복음을 전할지라도 상대방이 빨리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참고적으로 그들이 왜 성령 충만한 자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새 술’이라는 것은 ‘달콤한 술’을 뜻합니다. 즉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는 것은 포도주가 달콤해서 많이 마셨기 때문에 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성령 충만한 상태와 술에 취한 상태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비슷한 점을 몇 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로, 담대합니다. 술에 취하면 담대해집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윗사람 앞에서 꼼짝 못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술상을 부수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었지만 예수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성경 구절을 3,000 귀절 이상을 암송하는 박종면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술만 마시면 담대하게 되어 부모고 아내고 상관이고 가리지 않고 때렸습니다. 심지어는 길가는 사람들도 때려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지만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밖으로 뛰쳐나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제가 은평구 갈현동에 살았는데 집 앞에 산이 있었습니다. 산이 꽤 높아 간첩이 접선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산에 밤 12시에 올라가서 40일간 기도를 했습니다. 산은 낮에도 혼자 올라가면 무섭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혼자서 한 밤중에 올라가서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말을 많이 하고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일반적으로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도 술에 취하면 말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붙잡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술 먹은 사람에게 붙잡히면 이야기를 다 들어주느라고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또 술에 취한 사람은 한 말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또 했던 말을 또 합니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의미 없이 말을 많이 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많이 합니다. 저는 강릉 초당교회 김대기 장로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삼일 금식을 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거듭났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버스를 타거나 열차를 타면 수십 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에게 “아까운 사람 하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복음을 반복해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흥얼대고 즐거워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혹 우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흥얼대고 즐거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기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분당에 개척하기 전 치악산기도원에서 하루 17시간씩 40일간 특별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사임한지 1년이 넘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척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아 미래가 불투명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므로 성령이 충만하니까 너무 기뻐서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웃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넷째로, 돈을 아끼지 않고 씁니다. 술을 먹으면 돈을 잘 씁니다. 당장 때 거리가 없어도 술 먹는 시간만큼은 주머니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밭과 집까지 팔아 헌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오순절에 제자들이 한 방언과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는 방언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나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나 원어로는 다같이 ‘글롯사’라고 합니다. 따라서 원어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두 방언은 용도상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전도할 때에 사용하는 ‘대인 방언’이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사용하는 ‘대신 방언’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대인 방언일까요? 대신 방언일까요? 일반적으로 대신 방언으로 알고 있지만 대인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비롯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각종 표적이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조롱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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