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는 황금비율의 신앙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22^34-40 2014.1.26

//설에는 황금비율의 신앙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22^34-40 2014.1.26
설에는 황금비율의 신앙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22^34-40 2014.1.262018-12-03T21:11:28+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설에는 황금비율의 신앙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22^34-40 2014.1.26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49

    여러분은 종종 황금비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황금비율 얼굴, 황금비율 몸매, 황금비율 코디법, 황금비율 마스크 등등….. 오늘 설교제목에 황금비율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황금비율은 선분(線分)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짧은 부분과 긴 부분의 비율이 1:1.618로서 가장 조화로운 비율을 가리킬 때에 사용합니다. 황금분할은 기하학적으로 이미 유클리드가 정의한 이래 예술분야 특히 건축, 미술, 조각 등에서 즐겨 응용되고 있습니다. 건축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이고, 미술 분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이고, 조각분야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완벽함을 표현한 아프로디테 여신상입니다.

    저는 황금비율을 사용하여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신앙생활도 황금비율의 개념을 사용하면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의 결합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즉 수직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수평적인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가장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황금비율의 신앙은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과 한 율법사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율법사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해당되는 계명들을 찾아내도록 하였는데 613개의 계명이 있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중에 하라는 명령, 즉 작위 계명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명령, 즉 부작위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실은 이전부터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랍비 힐렐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7:12)를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랍비 아키바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를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든지 말꼬리를 잡기 위하여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신은 아니지만 신처럼 추앙을 받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다윗은 메시아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역사상 알렉산더 대왕을 영걸로 생각하고 흠모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마케도냐인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몽고 사람들에게 칭기스칸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백성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것을 요구하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실 정도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흉기를 들고 여러분의 자식을 내놓으라고 위협하면 내놓을 사람이 있습니까?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패물은 내주거나 자기 목숨을 내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식을 내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은 백성들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삽니다. 반부패 척결을 외치고 있는 현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하여 원자바오 전 총리 등 중국 지도부의 가족 일가가 해외 조세 피난처에 유령회사를 만들어 돈을 빼돌린 재산규모가 최대 4조 달러, 한화로 약 428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금년도 우리나라 총예산이 약 3558천억 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10배가 넘는 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주셨기에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를 요구할 권한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우리는 마땅히 효도를 해야 합니까? 자식들을 위해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저급한 것을 사랑하면 저급한 삶을 살게 되고 고상한 것을 사랑하면 고상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기도 하고, 돈을 사랑하므로 부자가 되기도 하고, 권력을 사랑하므로 높은 자리에 앉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라지고 변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면 영원히 갖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처럼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고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바스찬 바하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하나님을 사랑하자 역사상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탄생시킨 음악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성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7년 동안이나 그렸습니다. 천장 도배를 한번 해보세요. 조금만 해도 목이 뻐근합니다. 그런데 그는 7년 동안이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목에 혹까지 생겼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가 어떤 영광을 얻고 있습니까? 다른 작품 앞에서는 소리를 내고 감상해도 상관없지만 그가 그린 그림 앞에서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합니다. 단테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성경 시편 다음으로 아름다운 문장인 신곡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단지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세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는데 그분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 어떤 것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처럼 대우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겉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힘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부귀와 영광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설 명절에 무엇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설 명절을 앞두고 제사문제로 고민하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단호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제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선악과이기 때문에 결코 드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족과 다투기 싫다고 제사상에 절을 하면 잠시는 화목하고 평안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고 탄식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을 통하여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0-21절을 찾겠습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성경은 조상을 기리는 의미로 제사하는 것을 귀신과 교제하고 귀신의 잔을 마시고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할까요? 그것은 제사를 드릴 때에 쓰는 지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지방을 쓰는데, ‘아무개 神位라고 씁니다. ‘神位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이 의지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 이렇게 지방을 쓰는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즉 조상을 단순히 사람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의 제1계명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따라서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고 그에게 절하는 제사는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결코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제사를 드려야 할 경우는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절을 할 때에 그 자리를 잠시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귀신에게 제사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그와 동일하게 큰 계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율법사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만드신 것은 심판의 날에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만드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방인들을 천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은 계명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황금비율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긍휼을 베풀지만 동물은 오히려 공격하거나 잡아먹습니다. 돼지를 길러본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돼지는 먹이를 먹을 때에 다른 돼지가 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먹습니다. 다른 돼지는 굶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힘센 놈만 혼자서 밥을 독차지 하고 배불리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돼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귀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고픈 사람을 보면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신문에 아름다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한양대학교 내에서 구두수선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한 달에 백만 원을 버는데 그 중에 매달 만원을 떼어서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했다는 기사입니다. 그 기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힘들고 아파서 일을 나갈 수 없는데도 일을 하러 나간 것은 돈을 벌어야 한 달에 만원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살면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매달 만원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나는 이 만 원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은 소유가 많아진다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때에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베풀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20:35)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서 알지만 언제 행복합니까? 자식에게 효도를 받을 때입니까? 아니면 자식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할 때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가족입니다. 우리는 이번 설에 가족을 사랑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가족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황금비율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가족을 특별히 더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 년에 한 두 번이지만 설 명절에 가족을 찾아가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고, 거리가 멀면 기름 값도 많이 들고, 또 특히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뿐만 아니라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만이라도 가족들을 만나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런 신앙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번 설에 가족들과의 만남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습니까? 가족에게 가장 큰 선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가족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가족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가족을 만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마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저희는 설을 맞이하면 동기간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작지만 정성을 담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하여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이번 설에는 부모님의 선물만 챙기지 말고 동기간의 선물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물질에 인색하면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헌금을 많이 드리지만 동기간에 인색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찮은 일로 화를 내면 안 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사랑장인 13장에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설에는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어도, 남편이 마음에 안 들어도, 형님이나 동서가 마음에 안 들어도, 며느리와 사위가 마음에 안 들어도 꾹 참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화를 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화를 내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화는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어떤 분은 이번 설에는 끝장을 내겠다고 작정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아예 안 만나는 것이 낫습니다. 설 때 끔찍한 일들이 종종 발생하는 이유는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요셉이 형제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벌벌 떨고 있는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20-21)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미움의 방정식을 사랑으로 풀었습니다. 증오의 방정식을 용서로 풀었습니다. 복수로 풀지 않았습니다. 이번 설에는 요셉의 마음을 품고 가족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잘못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만나야 합니다. 또한 함께 모였을 때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관계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말을 하지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좋은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힘을 주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들은 자녀들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사는 자식이라고 대우하고 못사는 자식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리워 서 모처럼 만에 돌아왔는데 부모의 일방적인 생각을 자식에게 강요하면 부담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의 설에 해당하는 춘절을 앞두고 중국의 한 부모가 호주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에 애절한 소원을 담은 광고를 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아들 이름). 여러 번 전화했는데 안 받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에게 다시는 결혼하라고 압박하지 않을 테니 올해 춘절(春節, 중국 설) 때는 꼭 집에 와라.” 이 광고는 정말 가슴 아픈 광고입니다. 그러나 이만큼 자식들이 부모님의 잔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자녀가 살기를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잔소리를 하지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명절(名節)은 글자그대로 좋은 날입니다. 이 좋은 날을 가족이 사랑하고 화합하는 날로 보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번 설 명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제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동안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기간에 사랑을 베풀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 황금비율의 신앙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