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죽여야 순종할 수 있다 창 22:1-14 절 2014.10.5

//생각을 죽여야 순종할 수 있다 창 22:1-14 절 2014.10.5
생각을 죽여야 순종할 수 있다 창 22:1-14 절 2014.10.52018-12-03T22:32:3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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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몇 가지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에도 두 천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시고 신중하게 심판하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심판할 때에 감정에 근거하지 말고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로, 롯이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두 딸을 동네사람들에게 내놓겠다고 말한 것은 그가 딸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혹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아니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셋째로, 롯이 소돔성에서 성공했지만 소돔 땅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했듯이 이 세상도 불로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성공의 방향을 이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어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한 말씀이라도 붙잡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를 듣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1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1장 13절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따라서 창세기 22장 1절을 읽은 후, 야고보서 1장 13절을 읽거나, 야고보서 1장 13절을 읽은 후, 창세기 22장 1절을 읽으면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다소 혼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으로 보면 그런 혼돈은 즉시 사라지게 됩니다. 두 구절 모두 우리말로는 ‘시험’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로 보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의 시험은 ‘Test’이고, 야고보서 1장 13절의 시험은 ‘Temptation’입니다. 즉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은 ‘테스트’하셨다는 말이고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을 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시지는 않지만 ‘테스트’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실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마귀가 왜 우리를 시험하는지를 알면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왜 마귀가 유혹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정 반대로 살리고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는 순종하고 마귀가 시험할 때는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시험에는 좀처럼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마귀의 유혹에는 쉽게 넘어갑니다. 이제 정 반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에는 순종하고 마귀의 시험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번제는 5대 제사 중의 하나로서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을 죽여 모두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당시 가나안 땅에서는 아들과 딸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암몬족은 몰록이라는 신에게 아이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풍습을 가증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런 것을 절대로 본 받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 18:9-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금하신 것을 아브라함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것도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약속하시고 때가 되매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인 반응은 너무 예상 밖입니다.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아무 대꾸 없이 즉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시험을 당할 때에 순종히야 합격하여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번제를 드리러 모리아산으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자꾸 생각하면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성령의 감동을 받지만 즉시 순종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동신교회를 사임하는 과정에서 이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동신교회에 부임한 후 장로들이 헌금을 하지 않아 변화를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퇴할 때 받는 조건으로 먼저 20,000,000원을 내놓았습니다. 사임을 앞두고 이 돈을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저에게 그 돈을 모두 헌금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임하는 날짜가 계속 늦어지면서 그 돈을 동신교회에 드리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의 교회에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물리치고 동신교회에 온전히 바치기로 다시 결심하고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그 생각을 오랫동안하지 않고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했다면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대로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시거나 드리라고 감동을 주시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아들 문제로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주신 것은 어려운 때에 서로 돕고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더군다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만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내와 상의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문제를 가지고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순종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내와 합의해서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직접 명령하신 것은 사람과 상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을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다면 순종해야지 사람과 상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그를 부르셨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와도 의논하지 않았고 그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갈 1:15-17).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와 이 문제를 가지고 의논을 했다면 하나님의 시험에 불순종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맛보았고 계속해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관련하여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고 그가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창 15, 17장). 그런데 이미 그 약속이 성취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벌써 30대 중반의 남자로 장성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은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모리안산에서 이삭과 함께 번제단을 쌓을 때에 이삭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종들에게는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그가 혹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지라도 다시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시험을 하실지라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순종은 정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아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일 식사를 하듯이 날마다 큐티를 해야 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욥이 이토록 말씀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에게 불어 닥친 각종 시험 앞에서도 온전히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서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시험에 합격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천하장사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듯이 아무리 신앙경력이 많고 중직을 맡았을지라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직분과 신앙경력으로 자위하지 말고 말씀을 가까이 하여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몇 살이 되었을 때에 번제물로 드려졌는지를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때를 10대 중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창세기 22장 5절에 있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 ‘아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아이’라고 번역된 영어단어는 ‘boy’입니다. 우리는 ’boy’를 ‘소년이나 아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boy’는 남성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극히 평범한 남자’를 영어로 ‘boy next door’라고 하고, ‘고급품을 과시하는 남성’을 ‘boy with toys’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삭을 ‘아이’라고 표현했다고 10세 중반의 소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진 때를 10세 중반으로 보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기 1세기의 이스라엘계 역사학자인 요세푸스가 당시 이삭의 나이를 25세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삭의 나이를 10대 중반을 훨씬 넘은 30대 중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사라의 죽음과 이삭의 번제물 사건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3장 1절에 보면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까 자그마치 50년이나 빨리 죽은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자신과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번제로 드리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서 너무 놀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일 길을 가서 번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결과를 알기까지는 적어도 일주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의 여파로 심장병을 앓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사라의 갑작스런 죽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죽었을 당시 이삭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라가 이삭을 90세에 낳았고 127세에 죽었으니까? 당시 이삭의 나이는 37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삭이 번제물로 바쳐진 시기를 기존의 10대 중반이 아니라 그 이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삭이 장차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삭 대신 어린 양이 번제물로 드려진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 몇 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33세입니다. 그런데 33세는 단지 숫자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33세는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미숙한 시기가 아니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30세를 뜻을 세우는 시기라고 하여 ‘立志’라고 하였고,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不惑’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여물어야 하는데 그 때는 적어도 30세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삭이 번제물로 드릴 때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거절할 힘이 없거나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의적이었음을 뜻합니다. 즉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신을 내어드린 것처럼 자의적으로 번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삭처럼 온전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가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위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위에 놓고 칼로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눈을 들어 살펴보니 바로 옆 수풀에 걸린 한 마리 숫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양을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곳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의미로 ‘여호와 이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명려에 순종하기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한번 에덴동산으로 가보십시오. 에덴동산은 한 마디로 낙원입니다. 그런데 그 낙원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만들어져있었습니다. 그들이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단 한 가지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 말은 단순히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그의 생각대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은 땀을 흘려야 했고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살면 성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하게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우리는 여기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모르셨다가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듣거나 주변상황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당하고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너무 좋아 사랑에 깊이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갈등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신앙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전에는 믿음으로 따른다고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좇았어도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좇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에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아버지여 할 만 하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뜻대로 살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명령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주님께 순종하므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는 음성을 듣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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