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도행전 21:7-14 2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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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도행전 21:7-14 2020.5.172020-05-17T10:28:2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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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우리는 사도행전 211-6절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되새김질하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상선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이유로 세상의 문명을 단절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복음 전도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성령의 지시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는데,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둘 중의 하나가 성령의 음성을 잘못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두로에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인데, 그들이 바울에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상대방을 위해 기도할 때 뭔가를 알려주시면 먼저 이를 그에게 전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물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두로의 제자들과 작별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말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 순종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순종으로 인한 고통은 잠시뿐입니다. 3일만 참으면 영원한 영광에 참여합니다.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제자들과 작별하여 돌레마이에 도착합니다. 돌레마이는 ()를 숭상함이란 뜻으로, 두로 남방 40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에 있던 항구 도시이므로 두로에서 그곳까지는 하루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돌레마이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악고와 동일한 지역입니다(1:31). 구약시대에는 이곳에 베니게 즉 페니키아인들이 거주하였고 이스라엘이 한번도 점령한 일이 없습니다. 헬라 알렉산더 대왕의 왕국이 4분 되었을 때 톨레미 왕조를 창건한 톨레미 1’(B.C. 323-283년경)를 기념하기 위해 톨레미 2(Ptolemy , B.C. 283-247년경)가 붙인 헬라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톨레미 이후 수리아, 로마에 차례로 정복당했는데, B.C. 2세기경에는 유대 마카비 왕조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 항쟁을 벌일 때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은 악크레’(Acre, Akka)로 불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도착하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인조 항구를 축조하여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헌상(獻上)한 지중해 연안 도시입니다(10:1). 당시 로마 총독부가 위치해 있었고, 팔레스타인 제일의 거대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고향 다소로 가는 도중에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였고(9:30), 2차 선교여행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할 때 이 항구를 이용했고(18:22), 지금 3차 선교여행 중에 이곳에 머문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이곳에 감금되어 있던 중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한 후(23:23; 25:12)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25:13-27:1).

     

    바울 전도팀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의 집에 머뭅니다. 잠시 빌립이 어떻게 가이사랴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 문제로 교회 안에 불평이 일어나자 지혜와 성령의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출하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빌립입니다. 빌립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행전 8장을 강해할 때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불어닥치자 사도 외에는 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는데, 빌립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므로 그 성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마술사 시몬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시몬은 구원받은 후 빌립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며 놀랍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빌립을 광야로 가라고 하셔서 갔더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가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가보니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읽고 있었던 내용은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입니다. 빌립은 그가 읽고 있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를 묻자, 그는 가르쳐주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어린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가다가 물 있는 곳을 발견하고 세례를 요청하였고 이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물에서 올라오자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서 아소도에 갖다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순간 이동을 한 것입니다. 빌립이 아소도의 여러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에 이르러 그곳에 살고 있다가 지금 바울 전도팀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번 강해시간에 제 친구도 이런 경험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친구가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제사상에 차릴 음식을 만들지 않자 주인이 때렸는데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 오산리 기도원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집 주인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누가는 빌립의 집에 함께 살고있는 그의 딸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9절을 읽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에게 딸 넷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가 딸 넷이 예언하는 자라고 소개하고는 그들의 예언 사역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과거에 예언했는데 당시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언하다라는 동사가 현재 분사형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슨 이유로 누가가 그들의 예언 사역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까요? 저는 누가가 딸들의 예언 사역보다 빌립의 사역을 기술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8절을 읽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누가는 빌립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전도자라고 말합니다. 즉 누가는 의도적으로 빌립을 전도자로 말하여 두 사람의 만남을 복음 전도자의 만남으로 기술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해도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누가가 빌립을 전도자라고만 해도 되는데 굳이 빌립의 네 딸이 예언한다고 소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이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빌립의 딸들이 예언사역자로 사역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빌립이 그렇게 하도록 훈련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녀들이라도 크면 부모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빌립의 딸 넷이 예언사역자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이 어렸을 때 말씀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몇 주 전 새벽에 기도하던 중 갑자기 예진이에게도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주 전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참고로 누가가 빌립의 딸 넷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빌립의 아내는 빌립의 말을 듣지 않았거나 영혼 구원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지금은 복음 전도자로 만나고 있지만 20여 년 전에는 어떤 관계에 있었습니까? 가해자와 피해자입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했기에 빌립이 그곳을 떠나 가이사랴로 와서 살았고, 20여 년이 지나서야 같은 복음 전도자로 만난 것입니다. 누가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변화시켰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핍박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바꾸셔서 같은 복음 전도자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울을 바꾸신 것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때가 되면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김태규 성도가 진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강혁진 성도가 치유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대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핍박자 바울을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가 이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분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즉 김태규 성도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라고 신호를 보내시는 것을 빨리 알아챌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혁진 집사가 하나님께서 치유의 손길을 내미실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었을 때 누가 왔습니까? 10-11입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빌립의 집에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이같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가보가 그냥 예언하지 않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결박하는 행동을 하면서 말한 것 상징적 예언또는 시청각적 예언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자주 이런 방법으로 예언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허리띠를 풀고 신을 벗고 3년을 다녔는데, 이는 장차 애굽과 구스가 이렇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앗수르에게 끌려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토판을 가져다가 앞에 놓고 예루살렘을 그린 후에 그 성읍을 에워싸고 사다리를 세우고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430일 동안 누워 있었던 것은 1년을 하루로 계산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390년 간 지은 죄를, 유다가 40년 간 지은 죄를 각각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벨론이 유다와 주변 열방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무 멍에를 메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향에 있는 밭을 사므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회복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상징적 행동을 한 것은 그들의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상징적 행동을 한 것도 반드시 바울에게 결박당한다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가보가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11). 그래서 아가보의 말을 듣고 바울의 일행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던 것입니다(21:4).

     

    그런데 바울이 이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13입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단호히 뿌리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바울이 제자들의 만류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죽을 것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충성하라고 하시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아가보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바울이 성령의 뜻을 거역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1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가 장차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할 것만 예언했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성령의 뜻을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자 바울 선교단 일행이 어떻게 했습니까? 14입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그들은 바울의 단호한 거절에 바울 목사님이 너무 고집이 세다느니, 성령의 음성을 무시한다느니 등등 불평을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전도단 일행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각자의 생각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 큰지를 아시기에 이것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세 번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아시고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두 사람만 모이면 각자의 생각이 있기에 논쟁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툼과 논쟁은 소모적일 뿐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따라서 논쟁과 다툼을 피하려면 평소 주님의 뜻에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맡기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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