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변화되는가? 눅 19: 1-10, 2017.12.3

//사람은 언제 변화되는가? 눅 19: 1-10, 2017.12.3
사람은 언제 변화되는가? 눅 19: 1-10, 2017.12.32018-12-03T23:37:07+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사람은 언제 변화되는가? 눅 19: 1-10, 2017.12.3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6

    지난주에 이어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뽕나무’를 ‘돌무화과나무’로 바꾸었습니다. 어떻든 삭개오가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삭개오가 왜 예수님을 볼 생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삭개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누가는 삭개오가 부자이고 세리장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가 이런 사실을 굳이 밝혔을까요? 그런 것들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던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세무서장에 해당되는 지위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위에 있는사람이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그가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각종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것도 큰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세리들이 유대인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였던 마태도 들어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해석을 내놓을까요? 삭개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삭개오였다면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보려고 했겠습니까? 예수께서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세리들을 친구로 대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자는 자신의 현실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후자는 단지 호기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좇는 것은 돈만 있으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좇아 다녔던 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었지만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부자가 되었어도 만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돈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장이 되었고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돈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왜 삼성이 세계적인 재벌인데도 좀 더 갖기 위해 불법을 자행합니까? 좀 더 있으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낮은 행복지수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마음의 중심에 그분을 모시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남긴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자나 돈이 많은 자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가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말한 것이고, 마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9)고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께서 삭개오를 부르실 때에 왜 그의 이름을 부르셨느냐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와 초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계신 분, 이리로 내려오시죠?”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직접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속히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10장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자신과 삭개오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듯이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그와의 첫 만남을 가지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실 정도로 우리와 친밀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지구촌에는 수십억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고 거듭났다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혹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일대일로 친밀한 교제하실 수 있을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동시에 친밀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분과 많은 시간을 내서 교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말은 하지만 그분과 좀처럼 대화할 시간을 내지 않습니다. 주께서 시키시지도 않은 일로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주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은 다 주님께서 시키시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왜 큐티를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큐티를 하면 그래서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므로 잘했다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삭개오는 단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려고 했는데, 왜 예수께서는 그를 구원해주셨느냐는 것입니다. 3-4절을 읽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삭개오는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서 예수님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데 있어서 키가 작은 것은 큰 장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때에 삭개오가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는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으로 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삭개오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그것도 세리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무에 올라가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삭개오 자신도 큰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에 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삭개오가 무슨 힘으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간절함을 보시고 예수님을 단지 보려고만 했던 그를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어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미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절)고 말했던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모든 문제에서 구원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삭개오가 어떻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서 유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8절). 어떻게 삭개오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5-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그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영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삭개오의 집에 유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유한 것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는 동안 무엇을 말씀하셨을까요? 잠만 주무셨을까요? 삭개오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징조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예수님을 주시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다섯째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자 어떻게 변화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깨닫자마다 예수님께 한 말이 무엇입니까? 8절을 읽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를 돈을 벌기 위해 동족의 피를 빨아 먹고 있는 자라는 불명예까지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삭개오는 가장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백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치관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8절을 읽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22장 1절에 나옵니다. 한번 읽겠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그가 성경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그가 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삭개오가 평소 이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이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말씀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콰도르에서 선교하다가 29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짐 엘리엇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그의 일대기가 ‘창끝’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서 몇 해 전에 한국에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는 그가 평소 했던 말처럼 에콰도르 원주민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났기에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좇지 말고 말씀을 좇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기에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더처치 공동체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가야 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