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이렇게 고백하세요 마27장 11-26절 201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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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이렇게 고백하세요 마27장 11-26절 2012.6.242018-12-03T19:21:5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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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 몇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지 아십니까? 함께 사도신경을 고백해 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모두 몇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예수, 마리아, 빌라도 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이름 중에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는가 하면 수치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와 마리아는 영광스러운 이름이지만, 빌라도는 수치스러운 이름입니다. 날마다 십 수억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마리아에 대해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캐톨릭에서는 거의 신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욕을 먹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하면 구교와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데 현재 기독교인은 약 21억 6천 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빌라도가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저주를 받을 정도로 악한 짓을 했을까요? 사실 이 세상에는 빌라도보다 더 악한 죄를 지은 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고 6백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이고 ‘킬링필드’의 주범인 폴 포트는 200여 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을 비롯해서 일당 5명은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고 집에 소각장을 만들어 죽인 사람을 태워버렸습니다. 고재봉은 앙심을 품고 대대장 일가족을 도끼로 죽였습니다. 우범곤 순경은 무차별로 총기를 난사하여 58명이나 죽였습니다. 유영철은 원한도 없는 21명의 목숨을 토막 살인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전율케 하는 잔혹한 사건들입니다. 빌라도의 악행은 이런 사람들의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빌라도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잔혹하게 악을 행한 자들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렸는데 왜 빌라도는 계속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저주를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디오’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폰티우스’에서 나왔는데 ‘다섯 번째’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뜻대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뜻은 ‘창검을 든 자’인데 그에게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평소 창을 잘 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본디오 빌라도’는 창을 잘 쓸 줄 아는 용사로서 유대의 5번째 총독을 지낸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후 26년에 유대 총독이 되어 유다와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그에게 고소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뒤집어 씌운 죄목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는 ‘신성모독죄’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내란선동죄’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심리하기 전부터 사람을 보내어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꿈속에서 고생을 많이 한 일을 전하면서 예수님이 옳은 사람이니 그의 재판에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죄인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마 27:19). 그런데 빌라도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했습니다(23-24).

      그렇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예수께서 죄인이 아닌 자를 죄인으로 판결한 것입니다. 현행 우리나라의 재판은 3심 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삼심제도를 취하는 이유는 혹 재판에 오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심제도를 취해도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오판한 예는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재판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그의 잘못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에 의인이라고는 단 한 분뿐이신 예수님을 가장 극악 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형으로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그의 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빌라도의 죄는 단지 그의 죄만이 아니라는 것을 께달아야 합니다. 빌라도의 죄가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시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 법정으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빌라도 총독라고 합시다. 여러분 앞에 유대교 지도자들과 성난 군중들이 서 있고, 그 앞에 예수라는 볼품없는 한 사람이 끌려와서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이 여러분에게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하지 않으면 로마황제의 신하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란을 일으키겠소. 그리고 그 민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소.”라고 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독이라는 권력과 영광의 자리를 내놓고 볼품없는 예수님을 위해 죄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 그를 석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도 역시 빌라도와 똑같은 판결을 내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의 죄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빌라도의 죄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빌라도의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죄가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빌라도가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것은 그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였습니다. 총독의 자리를 내놓아야 하느냐 유지하느냐를 결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어떤 상황에서 양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립니까? 물질적으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자신의 양심을 속입니다. 자기보다 조금만 나아 보이면 시기하고 질투하여 공동체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많아도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면 불평을 마구 쏟아 냅니다. 마땅히 주일을 지켜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일로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데도 이러 저런 이유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명목상의 십일조만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시 빌라도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악한 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의 죄가 곧 우리의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부분을 어떤 자세로 고백했습니까? 혹 그가 양심을 어기고 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정죄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저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직접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가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재판하지 않았어도 우리도 그가 처한 상황에 있었다면 그와 동일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빌라도가 내린 판결이 곧 우리가 내린 판결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만 양심을 어기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빌라도를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심정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도신경으로 아무리 많이 신앙을 고백해도 빌라도를 정죄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고 날마다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빌라도의 죄를 자신의 죄로 깨닫지 않고 빌라도 개인의 죄로만 생각하여 그를 정죄하는 마음으로 신앙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범사에 자기의 허물을 날마다 깨닫고 회개하는 자만이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깨닫는 만큼 신앙은 자랍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지식이나 도덕적인 삶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쓴 디모데후서에서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깨닫는 자만이 주님을 제대로 만난 자인 것입니다.

      끝으로 빌라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는 고통이 따르고 또 그 죄는 영원히 우리를 수치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상에서 총독이라 영광과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권세는 잠시일 뿐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한 죄 때문에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 자마다 고통을 당하고 명예스럽지 못하게 되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한 죄로 백주에 자기 아들이 자신과 동침하던 여인들과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모두 헌금을 드렸다고 했지만 사실 반은 팔아서 감추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자 둘 다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했고 지금까지 두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불명예스럽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배신한 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회개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뜻이지 아무런 죄 값도 치루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는 반드시 고통과 수치가 따른다는 것을 아시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앵무새처럼 고백하지 말고, 빌라도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해야 합니다. “안창천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워지고 죄 사함 받은 감격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자세를 바꿈으로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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