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은 장애를 극복해야 이루어집니다 느2:11-20 201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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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장애를 극복해야 이루어집니다 느2:11-20 2014.3.232018-12-03T21:16:4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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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우리가 기도하면 사람을 움직이셔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처럼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곧바로 응답하시지 않고 기다리게 하시는 것은 그 기다림을 통하여 인내를 훈련하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가장 좋은 것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왜 예루살렘에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한 행동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3일간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3일 밤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 몰래 성벽을 시찰하고 나섰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위해 왔는데, 서두르지 않고 3일간이나 가만히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쉬어야 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영원히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아닥삭스다 왕으로부터 잠시 동안 특별 휴가를 받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피곤하다는 이유로 3일간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에 도착해서 3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 재건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3일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도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라고 말씀하셨듯이 주님의 인도가 없이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매사에 추진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보다는 자기 열정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가 없는 열정은 백해무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열정은 철로를 이탈한 기차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오직 율법 준수에만 열정을 쏟았을 때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잠언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보다 똑똑할 수는 없습니다. 제 아무리 능력이 많다한들 주님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3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무한정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밤에 몇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이 어떤지를 시찰했습니다(12절 중반부).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용의 우물)으로 분문(성안의 각종 오물이나 쓰레기를 성 밖으로 내 보내는 문)과 샘문과 왕의 못을 보고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골짜기 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왜 느헤미야가 먼저 한 밤중에 예루살렘 성벽을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의 상황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먼저 진단을 합니까? 진단을 해야 병의 근원을 알 수 있고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사가 제대로 진단을 하지 못해 오진을 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 후로 의사가 치료하는 것은 오히려 환자의 몸에 해로울 뿐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 분석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해결 받아야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작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이 힘들지 몰라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사업이나 육신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게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어디서 사랑이 식게 되었는지 그 원인부터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의 상황을 파악하는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아래 사람을 시켜서 예루살렘 성의 상황을 파악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현장에 갔습니다. 그가 직접 현장에 찾아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고난당하는 성도님을 특별히 심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각 목장의 목자들을 통하여 심방 요청을 받고 목장별로 심방할 수도 있지만 제가 요청하기전에 먼저 스스로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처럼 낮아지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개혁과 관련하여 7시간 끝장 토론을 했습니다. 최고 통치권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불통의 이미지로 굳어진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우십니까? 그렇다면 조금만 더 마음을 낮추십시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관찰시키려고 하지 마시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시고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느헤미야가 파악한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은 하나니 형제를 통하여 들은 대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습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느헤미야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었고, 그가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가 파악한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 느헤미야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17) 한 마디로 성을 건축하여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은 여러 번 성벽 재건을 시도했지만 좌절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성벽 재건의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희망을 말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 부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서로 동기 부여를 하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반드시 부흥이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동기 부여할 때에 어떻게 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18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신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간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경험한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형제 하나니로부터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장기간 휴가를 주고,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도록 마병과 마병을 붙여주고, 자신이 거할 집과 성벽을 재건할 재목까지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18절후반절). 느헤미야의 말에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증의 힘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평신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간증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평신도일지라도 얼마든지 삶 속에서 여러분이 만난 주님을 이야기함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간증하는 것보다 평신도가 간증하는 것이 훨씬 더 힘이 있고 마음에 와 닿을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그룹 목장에서 왜 말씀 교제를 하라고 그토록 입이 닳도록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보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나눌 때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스스로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혹자는 성공해서 남 주냐?”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성공이 자신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할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눔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말을 듣고 성벽재건에 불이 붙이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일을 반대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이 주동이 되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했습니다(19).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이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느헤미야를 통해서 보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고난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그가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음을 당했습니다(고후 11:24-27).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에는 항상 마귀도 일하기 때문에 늘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공격은 하나님의 일에 비례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마귀의 공격은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맨 처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반대한 사람은 산발랏과 도비야 두 사람뿐이었습니다(2:10). 그러나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돕는 자들이 많아지자 그 일을 반대하는 일에 산발랏과 도비야외에 게셈이 가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19).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추진할 때에 반대자가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반대할 때에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벽재건은 아닥삭스다 왕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19절 후반절).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에스라가 와서 성벽을 재건할 때에 르훔과 심새가 아닥삭스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그 일을 멈추게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느헤미야가 아닥삭스다 왕에게 청을 올려 다시 성벽을 재건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다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것은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왕을 배반한다는 말은 말 자체로 보면 매우 두려운 말입니다. 왕을 배반하면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는 거짓말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두려움을 가져다주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 마귀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대상은 겉으로 볼 때만 그렇지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마귀는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곧 죽는다고 생각하게 하여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암에 걸리면 죽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죽는 이유를 암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6:23)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은 죄 때문이지 암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부르실 시간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에게 이런저런 일로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고 그 마귀는 거짓으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는 것을 아시고 두려움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반대자들의 조롱과 협박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0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지만 반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20)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는 그들의 조롱과 위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느헤미야가 반대자들에게 그렇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가 한 말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20).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벽재건을 형통케 하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장애물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성벽재건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산발랏과 도비야가 반대했습니다. 또 게셈이 그 일에 합심하여 더 공격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 때문에 성벽을 건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형통과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아무런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런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형통이고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통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써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에 그가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능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세균들이 우리 몸으로 침입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걸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면역력이 있는 사람은 걸리지 않고 면역력이 없는 사람은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장애가 닥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는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습니다. 문제만 보고 절망하지 말고 문제보다 크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의 비전을 가졌지만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고, 성벽을 재건하기 전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간증을 통하여 백성들을 성벽재건에 동참을 시키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반대자의 협박을 이겨냈습니다. 비전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성취될 수 있습니다. 장애물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우리의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장애물을 극복하고 뜻을 이루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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