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의 운명 엡 2:1-3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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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자의 운명 엡 2:1-3 2012.10.282018-12-03T20:02:3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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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비신자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비신자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불신자를 국문법적으로 바르게 표기한 것이 비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신자’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장차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할 잠재적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딤전 2:4)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비신자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신자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고 장차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비신자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듭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주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지만 과거에는 주로 전나무나 소나무를 잘라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주로 어떤 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합니까? 잎이 시들거나 시원찮은 것으로는 하지 않고 가장 잎이 파랗고 싱싱해 보이는 나무를 잘라다가 만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잎이 파랗고 싱싱하게 보일지라도 잘리는 순간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아무리 멋지고 행복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비신자들을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오늘 읽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비신자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왜 그들이 죽었다고 하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세상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는 죽지 않았어도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으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통하여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곧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인 죽음만 생각하지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멋지게 보이기 위해 학위, 지위, 재물, 명예, 각종 보석 등으로 장식하고, 더 큰 집에 살려고 하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려고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건강관리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은 잠시 멋있게 보이기 위해 크리스마스트리에 방울을 달고, 캔디를 달고, 갖가지 색깔의 전구를 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은 아무리 대단하게 보일지라도 잠시 뿐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편 37편 1-2절)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잠시만 이 세상에서 화려하게 보일 뿐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잘 살아도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번 기회가 되면 산으로 가서 나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잠시라도 사람들에게 찬사와 영광을 받고 싶으냐? 아니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오래 오래 영광을 받으며 살고 싶으냐?” 정신이 나간 나무가 아닌 이상, 땅에 뿌리를 박고 오래 오래 살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비신자는 아무리 멋있고 아름답게 보여도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이 일시적으로만 반짝거린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신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성경은 비신자를 ‘마귀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신자들을 ‘마귀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면 ‘마귀의 지배를 받아 사는 삶이 어떤 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마귀는 죄를 짓게 합니다. 성경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 3:8)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배후에는 100%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마귀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하고 나자, 세상은 온통 죄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죄를 범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범죄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악랄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히틀러는 살아있는 사람을 가스실에 수백만 명을 넣어 죽였습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200여만 명이나 되는 양민을 학살했습니다. 몇 해 전, 아프리카에서는 사람을 죽여서 사자의 밥으로 주어 큰 충격을 안겨준 적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인육사건으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금년 10월 10일 쌍십절에 중국인들이 인육을 먹기 위해 한국에 여행을 온다는 소문이 청소년들 사이에 퍼져 그 날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자제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실제사건을 다룬 ‘공모자들’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영화는 중국 신혼부부 장기밀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일부단체는 그 영화에 힘입어 살인범 오원춘이 인육을 유통하기 위해 여성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에 대하여 재판부를 거칠게 성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피해여성을 죽인 후 몸을 280조각을 낸 다음, 뼈에서 살만 발라낸 후 균등한 분량으로 자른 살 조각을 20점 씩 14개의 비닐봉지에 나눠 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스컴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죄악으로 점점 물들어 가고 있습니까?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신자들은 이처럼 죄를 짓고 나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아는 바지만 죄를 짓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비신자는 죄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심적으로 큰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신자들은 겉으로는 행복한 것 같이 보여도 속마음은 불안하고 영혼은 황폐하기 때문에 불행한 자들입니다.

      2) 마귀는 이간을 시킵니다. 마귀는 ‘이간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틈만 나면 이간해서 하나님과 믿는 자의 사이를,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를 가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하는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 관계인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마귀는 거짓 것을 믿게 합니다. 성경은 마귀가 자신을 천사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말합니다(고후 11:14). 그렇습니다. 마귀는 거짓 것을 참된 것으로 믿게 하는데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도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이런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여서 참다운 진리를 보지 못하고 거짓 것을 믿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비신자들이 거절하는 것은 배후에서 마귀가 참 진리이신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에 속아서 살고 있는 사람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에게 끝까지 속아서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저주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비신자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3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즉 진노를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단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신분계급제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부모의 신분이 자녀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부모의 신분은 자녀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계급제도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의 범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이 인류의 첫 조상으로 우리를 대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잘못하면 온 가족이 큰 어려움을 당하듯이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범죄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범죄는 곧 우리의 범죄이고 아담이 받은 저주는 곧 우리가 받은 저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받은 저주가 무엇입니까? 하와에게는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저주가 임했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임한 저주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신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고통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에게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났는데 왜 예수님을 믿기 전과 동일하게 고통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비신자들과 동일하게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는 신자가 당하는 고통과 비신자가 당하는 고통이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고통과 비신자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비신자가 당하는 고통은 저주의 결과이지만, 신자가 당하는 고통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라는 싸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이 엄습해 올 때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라는 것으로 알고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죽은 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지 무슨 지옥에 가느냐고 빈정을 댑니다. 왜 사람들이 사후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것은 천국이나 지옥을 이 세상에서는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 지옥을 경험하지 못해도 지옥의 실재성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옥을 어떤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옥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지옥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누가복음 16장입니다. 여기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연락을 즐겼지만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부자는 음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는 지옥이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죽은 다음에야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종종 매우 힘든 상황을 만나면 지옥과 같다는 말을 하듯이 지옥은 고통이 영원한 곳입니다. 지옥을 왜 고통스러운 장소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곳에 한 번 던져지면 불로 소금 치듯함을 받는데 그 고통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다 죽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래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이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이 왜 영원하다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한 번 던져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죽은 후 음부에 들어갔는데 불꽃 가운데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번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연옥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연옥설은 죽은 가족들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12세기에 외경인 ‘마카비’에 근거해서 만든 비성경적인 교리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죽으면 축복의 장소인 낙원에 머무르고, 비신자가 죽으면 형벌의 장소인 음부에 임시 머물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는 육체의 부활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고, 비신자는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후손들의 영향으로 그들이 들어가 있던 곳에서 더 좋은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비신자의 영적 상태와 운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비신자는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이 죽은 자들입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살고 더욱이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큰 고통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죽은 다음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 자들입니다. 이렇게 불쌍한 자들이 비신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혹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살 산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찾아가서 그들의 실상이 어떤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 가족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들의 운명이 바로 이러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11월 4일이 바로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날입니다. 잃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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