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0: 27-40 2018.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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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0: 27-40 2018.1.282018-12-03T23:40: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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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살펴본 바로는 예수님과 가장 첨예하게 갈등을 보여 왔던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갈등을 빚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사두개인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27절). 여기서 우리는 사두개인이 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유대교의 중심축에 해당되지만 전혀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고 심판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리새파는 부활도 있고 영도 있고 천사도 있고 심판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한 하나님을 믿는데 이처럼 정반대로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두개파(Sadducess)는 기원전 6세기 말 바빌론에서 돌아온 제사장들이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헬라주의 영향을 크게 받더니 2세기에는 기존 제사장이었던 레위 지파 사람들을 밀어내고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을 제사장의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성경은 레위지파에 한하여 제사장을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성경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 심판 천사 영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런 것들이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파(Pharisees)는 ‘분리하다, 분별하다’는 뜻으로, 기원전 2세기 형성되었는데 주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을 차지한 사두개파에게 축출당한 전직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출신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에게 축출당한 후 대부분 수공업 같은 일반 직업을 가지고 회당에서 활동하였고, 일부는 회당에서 직업으로 필사업무와 교육, 율법해석 업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제사장 직을 빼앗겼지만 헬라주의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기 때문에 심판도 천국도 영도 천사도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저항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사두개파들이 헬라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기 생각대로 레위지파가 아닌 일반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자 심판도, 부활도, 영도 천사도 없다고 믿게 되었듯이, 우리가 점점 세상의 영향을 받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성경의 내용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활도, 영도, 천사도, 심판도 있다고 믿지만 세상에 저항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두개파처럼 부활도 영도 심판도 천사도 없다고 말하는 날이 돌아올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 청교도의 신앙에 기초하여 세워졌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타락의 길로 걷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영향을 받아 이 세상의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도 사두개파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고 성경을 가까이 하므로 이 세상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예수님과 논쟁할 때에 근거로 제시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계대결혼법’입니다. 모세는 당시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동침해서 후사를 가질 것을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이를 명령한 것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순전한 신앙의 대를 잇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도리어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과 논쟁을 했습니다. “칠 형제 중의 맏형이 어떤 여자와 결혼했다가 자식 없이 죽은 다음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칠 형제가 모두 자식 없이 죽었다면 부활한 후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계대결혼법을 명령하신 것은 이렇게 살라고 하신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명약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면 파멸에 이릅니다. 사두개인들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붕괴되어 제사장 직을 잃게 되므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두개인이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지 잘 사용하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말씀을 잘 사용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은 특별한 사람만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므로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활의 생명과 육체의 생명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34-36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무슨 말입니까? 육체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은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부활의 생명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죽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이 얼마나 다른 지를 성경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500명이나 되는 성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세상에서 40일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40일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었는데도 벽을 뚫고 그들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 구름을 타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생각을 죽이고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비신자들이 기독교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육체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이 전혀 다른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수준에서 부활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인데 어찌 육체의 생명과 전혀 다른 부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부활은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부활이 기독교의 시작이라는 말은 기독교는 시작부터 인간의 생각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부활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여는 열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육체의 생명과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활의 생명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사후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전개됨을 믿고 부활의 생명을 자라게 하는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연결된 자는 모두 살았다는 것입니다. 37-38절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부활을 의심하는 사두개인들을 설득하시기 위해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가시나무 떨기 사건’입니다. 우리는 가시나무 떨기 사건에 대해 무지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를 최고의 영웅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가시나무 떨기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가시나무 떨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출애굽기 3장은 ‘떨기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그의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시나무떨기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사라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이켜서 그 광경을 보려고 하자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4-6).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덧붙인 말씀이 있습니다. 38절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왜 예수께서 ‘가시나무 떨기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38절 말씀 즉,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수십 년의 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을 맺으면 모든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고 연결되면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인 죄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을 때에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가 연결되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하므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누가복음을 통해서 왜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평행구절인 마태복음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게 된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무슨 말씀입니까? 사두개인들이 모세오경을 들고 와서 부활이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이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성경을 오해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오해했다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이 구약성경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로 이해하지 않으면 왜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구원을 어떻게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은 우리가 뭔가 선한 행실을 해야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뭔가를 하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앞세우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오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과 상치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면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우리의 이성과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과 생각을 앞세워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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