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을 가져야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눅 24장 1-12 2018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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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을 가져야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눅 24장 1-12 2018년 8월 19일2018-12-03T23:54:0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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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때가 ‘안식 후 첫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로 일요일, 즉 주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안식 후 첫 날’이라고 말하지 않고 ‘새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벽은 문자적으로는 ‘깊은 새벽’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누가는 ‘새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새벽’(마 28:1), 마가는 ‘일찍이 해 돋을 때’(막 16:2), 요한은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요 20: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기자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시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대충 기록해서 그럴까요? 그런데 시간의 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여인들이 어두울 때 집을 나서서 새벽 날이 밝아 올 때쯤 무덤에 도착했는데, 그 중에서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때를 적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집에서 출발한 때를, 혹자는 무덤에 가는 도중의 때를, 혹자는 도착한 때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른 새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무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부터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0절입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누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였을 때 무덤까지 좇아갔던 여인들의 이름을 모두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 몇 몇 여인들의 이름은 밝히고 있습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복음서 기자마다 여인들의 이름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28:1),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막 15:47),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요 20: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기자가 공통적으로 기록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안식 후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히브리어 ‘미리암’에서 유래된 그리스어 이름인데 ‘저항하다, 반항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만 여럿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세베대의 아내 마리아 등이 있습니다(마 27:56, 요 12:1~3, 요 19:2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Magdalene)라는 지역 출신의 마리아를 일컫습니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다른 지역들보다는 도덕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그녀가 일곱 귀신에 들려 수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인을 고쳐주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까지 좇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는 시신이 안치된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무덤까지 좇아갈 수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시자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께서 진짜 메시아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또 세상의 것들을 좇아가는 것은 예수께서 정확히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않은 것도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끝까지 따르려면 가장 먼저 예수께서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부터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23장 56절과 24장 1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신 후 십자가에서 내려서 곧바로 무덤에 안치했기 때문에 향품을 넣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시신을 안치한 날은 안식일 전날이라 무덤만 확인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가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2-3절을 읽습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졌는데 주어가 없습니다. 즉 돌을 누가 옮겼는지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누가 옮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예수의 시체’앞에 ‘주’라는 칭호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2절에는 ‘예수의 시체’라고 했는데, 갑자기 누가복음 24장 3절에는 ‘예수의 시체’ 앞에 ‘주’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예수의 시체’나 ‘주 예수의 시체’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입니다. 이런 사실은 빌립보서 2장 8-11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11절을 읽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셔서 돌을 옮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무덤 앞에 돌이 굴려졌고 세마포만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4절). 바로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의 곁에 섰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천사였습니다. 그들이 당황하는 여인들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눅 24:5-7).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여인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알고 이미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은 당연한 줄 알고 당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수난예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를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16장 21절, 마태복음 20장 17-19절, 마가복음 10장 32-34절, 누가복음 9장 20-22절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 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가복음 10장 32-34절을 읽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여인들이 수난예고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봅니다. 누가복음 9장 20-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이처럼 예수께서 수난예고는 제자들에게만 하셨기 때문에 여인들은 예수님께 직접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시 본문 7-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여인들도 수난예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제자들에게만 하셨는데 어떻게 여인들이 이를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누가복음 8장 1-3절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 공동체에는 제자들만 있지 않고 이 여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할 때에 ‘제자들’ 안에는 이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수난예고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것을 회상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여인들마저도 빈 부덤을 보고서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두 천사가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어떻게 하였습니까? 8-9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여인들은 예수께서 하시기전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러자 여인들은 즉시 무덤에서 나와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지 않으면 복음증거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이를 전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3분복음메시지’와 ‘온가족튼튼양육 1과’를 반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뼈 속까지 새기라고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분복음메시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훈련을 하도록 만든 것이고, ‘온가족튼튼양육 1과’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는 훈련을 하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0-13절입니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전하자 사도들은 그 말을 허탄한 말로 듣고 믿지 아니했습니다. 특별히 ‘허탄’은 원어로 ‘어리석은 말’의 뜻을 갖고 있는 의학용어로, 이는 여인들이 전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정신 나간 자의 말로 여겼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나’는 미완료 과거로서 계속 믿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께서 부활하신 증거인 빈 무덤을 보고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여인들과 베드로가 똑 같이 빈 무덤을 보았는데 왜 여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증거 했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인들은 두 천사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회상했기 때문이고,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회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신앙생활은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을 읽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여기서 바울이 반복해서 사용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성경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누가는 빈 무덤을 통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는데 그 무덤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교주는 그들의 무덤을 세상에 남겼지만 예수께서는 무덤을 남기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평소에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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