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에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행 22장 30-23장 11절 2020.6.28

//복음 전도에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행 22장 30-23장 11절 2020.6.28
복음 전도에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행 22장 30-23장 11절 2020.6.282020-06-28T10:11:03+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복음 전도에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행 22장 30-23장 11절 2020.6.28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6

    지난주 사도행전 22장 22-29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왜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을 갖고 이방인들을 우습게 여기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민의식을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아는 것보다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천부장은 소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데, 왜 우리는 쉬운 길을 선택하면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것들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넷째로, 천부장이 로마법을 어긴 것을 알고 두려움을 느낀 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이 죄로 인하여 두려움에 있음을 알고 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앞에서 심판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천부장은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토록 죽이고자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로 데리고 갑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0명(의장 포함 71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이고, 의장은 대제사장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로마 지배하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체적으로 공회를 운영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게 종교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니까, 로마제국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는 자체적으로 종교문제에 관해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단 사형 집행은 로마 당국(총독)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회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1).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이를 듣자마자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2절). 아나니아는 ‘여호와는 은혜가 깊으시도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명이인이 셋이나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초대교회에서 밭을 판 돈을 절반만 드렸는데 전부 드린 것처럼 거짓말하다 아내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회심할 때 안수하여 잃은 시력을 회복하게 한 자입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입니다. 이 아나니아는 주후 47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폭력과 암살을 일삼았고 아주 탐욕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드린 십일조까지 횡령했습니다. 그는 직함만 대제사장이었지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말을 듣던 중 갑자기 입을 치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1절에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1절의 말을 한 후, 아나니아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1).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을 할 때 공회를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주목했다는 것은 똑바로 봤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잘못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는데 바울은 똑바로 쳐다 보며 말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을 ‘공회 의원’이라고 칭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존칭어만 들었는데 바울이 형제라고 했기에 심기를 건드렸을 것입니다. 셋째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나이나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그를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그렇게 말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부실한 부분을 감추기 위해 석회 등으로 담을 도색했는데(겔 13:14), 아나니아의 행동이 그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회원은 법을 집행하는 자이므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모세 율법은 두세 증인들의 증언이 있을 때만 사람의 범죄를 확정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신 19:15-19) 아직 죄인으로 판결이 나지 않는 사람의 입을 치라고 한 것은 법을 어긴 것입니다. 즉 자신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위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선은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외식해서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23:27).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교회지도자들이 위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부터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설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말씀으로 성도들을 책망하지만, 본인은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본인은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라고 합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공식 석상에서 입는 의복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천부장이 갑자기 공회를 소집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옷을 입고 올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교를 나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제사장이 누군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방이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과하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5). 즉 성경에 백성의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사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판단하고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과 사역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감정을 말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제가 왜 D3전도중심제자훈련을 창안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세 가지 사역을 제자들에게 훈련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제자훈련을 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6절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70명이었는데 대부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였습니다. 두 그룹은 전혀 생각이 달랐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극보수와 극진보처럼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주전(BC) 2세기경,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제사장들이 성전관리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사두개파가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권위만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을 뿐,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나 부활과 영생과 내세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주의자로 살아갔고 거룩한 성전을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장마당으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 혹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바리새’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속적인 것과 불경한 것들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전(BC) 2세기경 유대교 개혁에 앞장섰던 하시딤의 후예를 자처하여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을 다 정경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조상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천사와 영의 존재와 부활과 영생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청중 가운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있는 것을 알고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6절을 다시 읽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헬라어 원문에는 ‘바리새인의 아들’이 ‘바리새인들’로 되어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 당대에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바리새파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리새파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7-8절을 읽습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다투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부활에 대해 말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가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라고 말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바울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싸움을 부추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바울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을 이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복음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삶을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공회 중에 두 그룹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전한 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그것은 전도대상자를 바리새인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사두개인들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 때입니다. 지금의 위기의 때입니다. 신앙이든 사업이든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9-10절입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바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나 함께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다 혹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나서 바울과 자신들이 믿는 것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바울에 대한 공격을 접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나름 바울의 전도전략이 먹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누가는 이 일 후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회 사건 이후 예루살렘 내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 감정이 많이 수그러졌다고 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타겟을 분명히 하면 바울처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부장이 어떻게 합니까? 10절입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결국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다툼은 큰 분쟁으로 번졌습니다. 여기서 ‘큰 분쟁’이란 무력을 동원한 다툼을 뜻합니다. 즉 치고 박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똥이 바울에게 미쳤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 상황이었습니다. ‘찢겨지다’라는 말이 ‘산산조각 나다, 박살나다’라는 뜻입니다. 천부장은 그냥 두면 바울이 곧 찢겨 죽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영내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이런 상황을 왜 기록했을까요? 바울의 설교 때문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서로 싸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바울을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녀들을 위기에서 건지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코로나19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19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바울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1절을 읽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날 밤’은 즉 찢겨 죽을 뻔한 위기를 맞았던 날의 밤입니다. 주님은 항상 위기 상황에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네가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통해서 바울을 위기의 상황에서 건져주신 것은,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 관리를 잘해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복음 전도 사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늙기 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곧 복음을 전하지 못할 때가 옵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