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눅6:20-26절 2015. 12. 20

//복과 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눅6:20-26절 2015. 12. 20
복과 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눅6:20-26절 2015. 12. 202018-12-03T22:59:5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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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께서 제자를 선택하시기전, 산에 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과 관련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산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에 대한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성전이나 길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도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전이나 길거리에서 기도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산에 가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한마디로 기도의 혁명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은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것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함이 없는 사람은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능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친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복과 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어떤 자가 복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가난한 자입니다. 성경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구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무엇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든 가난하지 않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자가 가난한 자며 그가 바로 복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들을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행 구절인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대신에 ‘천국’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데, ‘나라'(헬, 바실레이아)는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습니다(마 6:10;10:7;12:28). 즉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 받지 않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않느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실패한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거하고 있다면 그는 진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로, 주린 자입니다. 21절 상반절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주린 자가 복이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에 주린 자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의’를 갈망하고 소망하는 자가 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의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린’에 해당하는 단어가(헬, 페이논테스) 현재분사로 사용되어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만 의를 갈망하면 안 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누가는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배부름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부름’은 단지 배가 부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의롭게 살지 않고 죄를 지으면 만족이 없고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인간은 항상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부름을 얻다’는 동사가 능동태로 쓰이지 않고 미래 수동태로 쓰여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배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되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족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는 자입니다. 21절 하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여기서 ‘울다’는 동사는 ‘클라이오’로 통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울다’를 ‘애통하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는 자가 복이 있을까요?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눈물 없이 사는 것이 복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이라고 다 같은 눈물이 아닙니다. 회개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신체타령을 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후자의 눈물은 아무리 많이 흘려도 복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죄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울다’는 동사가 현재분사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죄를 인하여 항상 애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만 회개하지 말고 구원받은 후에도 끊임없이 죄를 인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애통할 때에 어떤 복이 임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런데 여기서 ‘웃음’은 겉으로 소리 내어 웃는 웃음이라기보다는 내적인 웃음, 즉 영적인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웃음에는 크게 두 가지 웃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웃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웃음입니다. 육체가 좋아서 웃는 웃음은 육신의 웃음이고 영혼이 좋아서 웃는 웃음은 영적인 웃음입니다. 육신의 웃음은 육체가 편하면 나오고 육신이 불편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웃음은 육신의 편함과 무관합니다. 영적인 웃음은 죄를 고백해야만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세상이 알 수 없는 웃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죄를 인하여 애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기쁨은 죄를 애통할 때에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넷째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입니다. 22절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인자’라는 단어가 본서 중에는 여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로 사용하셨습니다(9:26;11:30;17:22). 따라서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버림을 받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3절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한 마디로 하늘에서 받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상에는 현세의 상과 미래의 상이 있습니다. 현세의 상은 미래의 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상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모두 사라지지만 미래의 상은 아무리 작을 지라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에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이 미워하고 핍박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시대를 불문하고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 정반대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더 소중하게 평가합니다. 성경은 물질보다 영혼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성경은 지금보다 미래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성경의 교훈대로 살아가려면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핍박을 당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거슬러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아무 고통 없이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죄 때문에 애통하고, 복음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기를 바라고, 진짜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떤 자에게 ‘화’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4-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4-26).
    본문에 화를 받는 자들은 4그룹입니다.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우리가 모두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런 복을 받은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런 것들을 이 세상에서만 누리려고 하고 그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고 이 세상 것만 추구하고 이 세상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저주 화를 입게 됩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화와 복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게 되었고 저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화와 복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화를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영원히 복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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