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미사건을 복음으로 해석하다 창 27:1-40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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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미사건을 복음으로 해석하다 창 27:1-40 2014.10.262018-12-03T22:33:3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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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상대적으로 깁니다. 이 내용은 한 마디로 별미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죽을 날을 앞두고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려고 별미를 만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엿들은 리브가가 야곱에게 염소를 가져오게 해서 별미를 만들어 이삭에게 드림으로 먼저 복을 받게 합니다. 그 후 에서도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지만 복은커녕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면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로,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로, 에서와 야곱 모두 이삭에게 별미를 갖다 드렸는데 왜 에서는 저주를 받고 야곱은 복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로, 야곱이 에서의 이름을 사용하여 복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넷째로, 왜 이삭이 야곱에게 속임 당한 것을 알고서도 축복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에서를 저주했느냐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에서가 장자권을 잃은 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째로, 야곱과 리브가가 이삭을 속이고 축복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형 에서와 한 날 한 시에 한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나왔지만 에서보다 조금 늦게 나온 이유로 차자가 되어 장자의 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거짓과 싸우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리브가가 이삭을 속이고 축복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는 참 종교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 축복을 가로챈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야곱과 리브가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과 리브가의 거짓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킨 것으로 단순히 거짓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 견해 중 어떤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들의 거짓말을 잘못이라고 비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야곱과 리브가의 행위를 비판하지 않는데 우리가 비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기생 라합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나라를 정탐하러온 자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녀의 거짓은 우리나라 형법 제 93조의 여적죄로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중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거짓말을 믿음으로 했다며 칭찬하고 있습니다(히 11:31). 현재 중국에서 외국인이 중국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불법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신분을 속이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말이 비난 받아야 할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는 우리의 윤리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거짓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짓말은 도리어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많이 내려고 세금을 포탈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국세 받을 자들에게 국세를 바치고 공세 받을 자들에게 공세를 바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야곱이 리브가와 함께 거짓말을 했어야만 장자권을 얻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즉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야곱이 장자가 될 수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거짓말하는 과정을 한 번 추적해보았습니다. 먼저 리브가가 거짓말을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삭이 아이를 낳지 못해 기도하자 리브가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뱃속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이 모태에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에서와 야곱은 모태로부터 싸움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태중에서 그들이 싸울 때에 리브가가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그래서 리브가는 뱃속에서부터 두 아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이 사실을 알고서 남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기도로 자신이 임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만 서로 달랐습니다. 에서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았지만 야곱은 매끈매끈했습니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전혀 삶이 달랐습니다. 에서는 눈만 뜨면 들에 나가 사냥해서 짐승을 잡아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주로 집안에서 어머니 일을 거들어주었기 때문에 리브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죽기 전 자식들에게 복을 빌어주면 그것이 곧 그들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삭이 에서를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면 복을 빌어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이 말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장자로 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평소 이삭이 여러 면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남편을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직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몹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브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에서를 장자로 세우도록 버려둘 것인지, 아니면 남편을 속이고 야곱을 장자로 세울 것인지 … 결국 리브가는 고민을 하다가 남편을 속이고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리브가가 이삭을 속이지 않았더라면 에서가 장자로 복을 받았을 것이고 이삭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불순종한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리브가의 거짓말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의 대상인 것입니다.

    다음은 야곱의 입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에서보다 늦게 나온 이유로 차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평소 이 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장차 자기가 형을 제치고 장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차자가 장차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장자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갂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팥죽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팥죽사건은 창세기 2527-34에 나옵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배가 매우 고팠습니다. 그런데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팥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형이 배가 고파서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미끼로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형제 사이에 장자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야곱이 평소 장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과 팥 죽 한 그릇을 맞바꾸자는 야곱의 제안을 아무 고민없이 응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이 에서에서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날 이후로 야곱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아버지가 형 에서에게 복을 빌어주겠다고 하는 말을 전해 듣자 에서로 변장하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별미를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장자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말은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였고, 당연한 권리행사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말을 세상의 윤리적 관점에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로, 왜 에서나 야곱이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드렸는데 에서는 저주를 받고 야곱은 축복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한 동안 부흥사들이 강단에서 복을 받으려면 에서가 별미를 이삭에게 바친 것처럼 특별헌금을 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성도들은 복을 받기 위해 부흥회 마지막 날에 특별헌금을 작정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어서 알듯이 에서나 야곱이나 모두 별미를 드렸지만 야곱은 복을 받았고 에서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해 특별헌금을 드리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물질의 복을 받도록 특별헌금을 드리라고 권하려면 고린도후서 96을 근거로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기 때문에 물질의 복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심어야 합니다. 어려워도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물질의 복을 받은 사람은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려고 기록되었을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가면 복을 받고, 어떻게 나가면 저주를 받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모두 이삭에게 별미를 바쳤지만 에서는 저주를 받고 야곱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별미는 축복과 저주를 요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축복과 저주로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별미를 만드는 과정과 별미를 드리는 과정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에서가 어떻게 별미를 만들고 아버지에게 가지고 나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에서는 나가서 사냥을 해서 혼자 스스로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아버지께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와 정 반대였습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염소를 가져왔고 어머니가 대신 별미를 만들어주었고 자신을 에서처럼 분장하고 에서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즉 에서는 자기 스스로 별미를 만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갔지만 야곱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고 형 에서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별미를 만들고 드리는 과정의 차이로 한 사람은 축복을 받고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별미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여는 열쇠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을 여는 열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사건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야곱이 형처럼 털로 자신을 꾸미고 아버지에게 나갔듯이 우리도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가지 말고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이 에서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나갔듯이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별미사건은 야곱이 형 에서로 꾸미고 에서의 이름으로 나가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철저히 예수의 피로 자신을 가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갈 때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나가면 저주를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면 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죄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생명록과 행위록이 있습니다. 생명록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되고 행위록에는 우리가 각자 선악간에 행한 일들이 기록됩니다. 그런데 행위록에 기록된 것을 영상으로 돌려본다면 걸음마다 자욱 마다 다 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름을 행위록의 검색창에 치면 죄인이라고 뜨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 있는 채로 나가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나가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 에서처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나가려고 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험에서 승리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복은커녕 고통밖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반드시 죽지만 영으로서 육신의 생각을 죽이면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야곱이 에서의 이름으로 사용하여 복을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개인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름과 사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안창천과 저는 구분될 수 없습니다. 제가 곧 안창천이고 안창천이 곧 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부에 등록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땅의 주인은 여러분이 아니라 등기부에 등재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설령 에서의 이름으로 나가서 복을 받았어도 그 복은 에서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받지 않고 에서의 이름을 사용한 야곱이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에서의 이름을 사용하여 복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에서는 야곱의 형입니다. 즉 맏형입니다. 야곱이 맏형인 에서의 이름을 사용하여 복을 받았다는 것은 맏형이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0:13).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영적인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구원도 받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가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자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행 3:6).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곳에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우리가 마음껏 사용하도록 빌려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자간에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이름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하고 더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넷째로, 왜 이삭이 야곱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서도 축복을 취소하지 않고 에서를 저주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 줄 알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식에게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화가 나서 당장 축복을 취소하고 야곱을 혼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야곱에게 빌어준 복을 취소하지 않았고 혼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별미를 들고 와서 복을 달라고 하자 빌 복을 남겨두지 않아서 복을 빌 수도 없고, 또 이미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아버지가 빌 복이 어찌 이 하나 뿐이냐며 자신도 복을 달라고 매어 달리자 이삭은 최종적으로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삭이 복을 달라는 에서를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삭은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기 전까지만 해도 오직 에서를 축복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삭이 이토록 돌변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후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장자로 세우려고 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평소 이삭은 리브가를 통하여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생각대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생각과 상관없이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은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장자로 세우신 것을 다시 깨닫고 야곱에게 빌어준 복을 취소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에서를 저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에서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지 않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그를 저주한 것은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는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별미사건을 보면서 이삭처럼 우리의 생각에 대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단호히 거절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결단을 본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에서가 장자권을 잃은 것을 보면서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에서가 장자권을 잃게 된 것은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실제로 장자권을 잃게 된 것은 그것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생각하고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장자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결코 팥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 팔았을지라도 나중에 다시 동생에게 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장자권을 팔아버린 후 별미사건을 맞이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장자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잃고 장자가 차자가 된 것은 에서가 당장의 배고픔만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행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에서가 한 일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히브리서 12장 17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육적으로는 장자와 차자의 순서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미래의 영적인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언제 영적으로 장자에서 차자로 추락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장자만 받을 수 있지 차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미래의 영적인 것을 소홀히 여기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잃어버린 후 통곡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육신의 것보다 영적인 것을 더 소중히 여김으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복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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