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행 24:10-27절 20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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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행 24:10-27절 2020.7.262020-07-26T10:11: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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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4장 1-9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살핀 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더둘로가 승소하기 위해 벨릭스 총독에게 아첨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썩어져 없어질 것을 위해서도 자기 마음에 없는 말을 했는데 과연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사꾼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장사꾼은 물건을 팔기 위해 손님을 기쁘게 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습니다.

    둘째로, 왜 더둘로가 바울을 전염병자와 같은 자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행위가 급속도로 번져서 로마제국에 크게 영향을 미칠 위험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수 바이러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과 관련하여 세 글자 이름 외에 다르게 불리지 않는다면 복음 증거자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셋째로, 더둘로의 거짓 고소에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더둘로의 고소가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의 변론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거짓을 옳다고 한 것은 옳고 그름을 사실이 아니라 진영논리에 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영논리로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넷째로, 더둘로 변호사가 거짓 증거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변호사가 되려고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돈을 벌기 위해 거짓 변론하는데 사용 했습니다. 우리도 수고해서 얻은 돈, 지식, 명예를 더둘로처럼 거짓을 증거하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아니한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문 변호인을 고용하지 않고 직접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총독께서 여러 해 동안 유대 민족의 재판장이 되신 것을 내가 알고 있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 변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더둘로와 바울의 변론의 서두를 비교해보면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아첨과 칭찬을 했지만, 바울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바울은 더둘로처럼 총독에게 아첨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재판의 열쇠를 벨릭스 총독이 쥐지 않고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주님께서 쥐고 계신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아첨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 취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사람을 의지하는지 하나님을 의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칭찬하고 있다면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고, 진실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더둘로가 고발한 내용에 대해 반박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1-13을 읽습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은 더둘로의 주장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하나는 그가 예루살렘에 12일 동안 머물었는데 어떻게 짧은 기간에 정치적 소요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에서 12일 있는 동안에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단지 12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바울은 12일 동안 자신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행 21:17), 총회장 야고보와 의논하고(행 21:18), 결례를 행하다가 붙잡혔고(행 21: 26,27), 산헤드린 공의회 심문을 받았고(행 22:30), 유대인의 음모가 있어서 밤에 가이사랴로 왔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이나 회당이나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요를 일으키려고 성전과 회당과 시중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변론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매우 논리적이고 철저히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려면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 세상에서도 준비하지 않은 자는 성공할 수 없듯이 복음을 전하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평신도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14-16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하여 자기를 고소한 자들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그는 그들과 같은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그들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된 것, 즉 타나크를 다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고소한 자들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믿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선지서와 성문서는 믿지 않고 모세 오경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부활도 영도 천국도 믿지 않고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바리새파만 이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당시 유대교는 크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에세네파였는데 그를 고소한 사두개파는 종교를 빙자한 정치집단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바리새파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사두개파처럼 정치화된 집단과는 무관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순수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17-20절입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그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소동을 일으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온 것이고, 또 자신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소동을 모의하거나 더럽히려고 한 것이 아니라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도,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21입니다.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이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것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제 총독 벨릭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이 더둘로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한 후입니다. 즉 총독 벨릭스가 양쪽 말을 듣고 판단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아무 때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되 기회를 만들어서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변론하자 벨릭스 총독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2-23절입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본문에서 ‘이 도’라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총독 벨릭스가 어떻게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세 가지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이사랴에 전도자 빌립이 살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그의 아내인 드루실라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유대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으로서 업무상 그런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둘째와 셋째 의견이 다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세 번째 의견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드루실라는 유대인이지만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벨릭스는 당시 약 8~9년 동안 총독으로 재위했기에 복음으로 인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갈등이 있었기에 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총독은 무죄 석방을 하지 않고, 바울에게 자유를 주고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총독이 이렇게 한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26-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첫째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래서입니다. 어떻게 벨릭스가 바울에게 돈을 받을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1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당시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바울이 거금을 모아 부조했습니다. 이미 총독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직접 자신 앞에서 이를 말하자 그가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유다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져왔다고 했기 때문에 거금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27절입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무죄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석방하지 않고 구류한 것은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총독은 여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은 유대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바울의 인권을 유리한 것입니다. 즉 개인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짓밟힌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지 개인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논리적으로 더둘로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유대인 지도자들이나 이방인 총독 벨릭스의 마음과 생각을 전혀 바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무죄 석방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변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소송 절차에 따라 총독 앞에서서 변론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변론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론한 것은 단지 법적 절차에 따른 변론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임금 앞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복음을 믿든 안 믿든 전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주에 세 번 택시를 탔습니다. 세 번 모두 운전 기사에게 전도했는데 세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한 사람은 믿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처음을 복음을 들어본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천주교에 다닌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천주교에 다닌다고 말한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않겠다고 하다가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자, 믿겠다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순간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에 실패하는 것은 상대방이 안 믿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버울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넘지 않았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반드시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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