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다 행 21장 1-6 2020. 5. 10

//바울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다 행 21장 1-6 2020. 5. 10
바울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다 행 21장 1-6 2020. 5. 102020-05-10T09:54:0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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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크게 네 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다시 한번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피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가 탄생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 와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교회 안에서도 거짓 교리를 따르는 자들이 나오게 된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빛과진리교회가 강도 높은 훈련을 빌미로 인분까지 먹이게 한 일로 세상으로부터 매서운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의 예언대로 거짓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후서 63-10절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한 고난을 체험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지 못함을 훈련한다고 강제로 3일 금식을 하게 했고, 매 맞음을 훈련한다고 게이 바 골목에 가서 매 맞을 때까지 전도하게 했고, 영광과 욕됨을 훈련한다고 사창가에서 전도하게 했고, 많이 견딤을 훈련한다고 양수리에서 교회까지 30km를 7시 30분 만에 행군해서 도착하게 했고, 갇힘을 훈련한다고 음식물 쓰레기장에 3시간 동안 갇혀 있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지 예수께서 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훈련하시지 않았습니다. 빛과진리교회가 훈련한 것은 주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이렇게 변할지 모르기에 항상 진리 가운데서 행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왜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공의의 말씀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단순히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이 세 개라고 했습니다. 말씀, 기도, 성례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죽음을 앞둔 바울과 함께 울어줄 자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에베소 장로와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그들을 말씀으로 낳은 영적 아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일날 교회에와서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므로 함께 울어줄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전도팀이 밀레도에서 작별한 후 배 타고 고스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고스는 밀레도에서 약 68km 거리에 있는 비옥한 작은 섬입니다. 그곳에서 한밤을 지내고 이튿날 로도에 이르렀습니다. ‘로도’는 고스에서 동쪽 85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일년 사계절 풍부한 일조량으로 장미가 만발하여 ‘장미의 섬’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폴로 신상’이 있습니다. 또 에게해 입구일 뿐 아니라 지중해를 내다보고 있었기에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리고 수사학과 웅변학이 발달했습니다. 거기서 ‘바다라’로 갔습니다. 바다라는 로도 맞은 편 85km에 떨어져 있는 루기야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베니게로 갔습니다. 베니게로 건너가는 중 구브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바울이 1차로 바나바와 함께 첫 선교운동을 전개했던 곳으로 점쟁이 바예수와 격전하여 굴복시키고, 그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났던 곳입니다(행 13:4-12). 바울은 그 곁을 지나며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지중해를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태운 배가 두로에 상륙했을까요? 3절에 나와 있듯이 그곳에서 배의 짐을 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짐은 바울 전도팀의 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이 탄 배는 바울이 전도하기 위해 전세 낸 배가 아니라 상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전도하기 위해 상선을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문명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잠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문명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있고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그룹이 있습니다. 전자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그룹이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개신교 종파의 하나로 현대문명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마을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2년 전에 그곳에 D3제자훈련을 하려다가 그곳 목회자가 제자훈련에 관심이 없어서 중단했습니다. 본래 아미쉬는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모국어인 독일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영어는 아미쉬 학교에서 배웁니다. 전기를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해가 뜨는 시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만 일하고, 그 후에는 집에서 촛불을 켜고 생활합니다. 전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어 손빨래를 해서 뒤뜰에 널어놓습니다. 그들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선택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관광지가 되어 찾는 이들이 많아 레스토랑과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등 문명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아미쉬 빌리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속화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것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지,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세상 사람들과 차단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거룩함을 빌미로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무장하고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그룹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당시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특별히 과학 문명이 만들어 낸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특별히 21세기는 스마트폰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복음 전도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인터넷이 없다면 카톡으로 매일큐티를 전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유투브 광고 중에 SK에너지에서 광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 중에 자녀가 게임에 빠져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가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평소 공부를 하지 않아 속을 썩였던 자녀들이 SK에너지에 취직합니다. 왜 SK에너지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게임을 잘하는 학생을 뽑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SK에너지는 타업종보다 고난도의 집중을 요구하는데, 게임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는 자들보다 집중력이 더 높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가 짐을 풀려고 두로 항에 정박하자 바울이 무엇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4입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은 제자들을 찾았고 그들과 함께 머물었습니다. 어떻게 두로에 제자가 있었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스데반의 순교 때 박해를 받아 흩어진 성도들이 여러 곳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도행전 11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본문의 베니게는 두로를 뜻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제자로 세운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을 읽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며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교회에 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자, 바울과 바나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베니게, 즉 두로를 거칠 때 형제들을 만나 이방인이 주께 돌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를 했고 이때 제자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두 번째를 주장하지만, 저는 세 번째를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제자들을 ‘찾았다’고 하는데, ‘찾았다’는 것은 수색하여 발견하다‘의 의미로 제자들의 거처를 수소문하여 애타게 찾는 모습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알고 있는 제자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과 함께 이레를 머물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3년이나 목회한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여 설교한 것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두로에서 이레나 머문다는 것은 선 듯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혹자는 짐을 내리기 위해서 즉 하역하는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하역하는데, 7일이나 걸린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저는 상선이 자주 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온 첫 선교사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입니다. 그들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배로 인천으로 들어온 날이 1885년 4월 5일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그해 부활절이었습니다. 두 선교사가 부활절에 맞춰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시 한국은 은둔국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운행하는 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와 보니 마침 부활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제자를 찾아서 만난 제자들이 바울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14을 다시 읽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여러분이 알다시피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은 성령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매였다’는 것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두로에 있는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즉 바울도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한 것이고,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박해가 있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충돌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둘 중의 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잘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살펴보았듯이 둘 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성령께서 두로에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이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인데, 그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 그에 관한 것을 알게 하실 경우가 있는데 이를 직접 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할지 아닐지는 별도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대부분 알게 하시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 가서 말하라고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5-6절을 읽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작별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1절에는 바울 일행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는 장면이 나오고, 5-6절에는 바울 일행이 두로에서 그 지역의 제자들과 작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두 ‘작별’은 헬라어로 아포스파스텐타스인데 이는 ‘찢어놓다’는 뜻입니다. 즉 헤어지기 싫은데 억지로 헤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왜 바울이 이토록 헤어지기 싫었는데 억지로 헤어졌을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령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싫어도, 고통을 당해도 순종해야 합니다. 고통은 3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원치 않는 3일의 고통을 참으면 영원히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날마다 육체의 생각을 죽이고 영이 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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