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함께 승선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다. 사도행전 27장 1-8절 2020.8.30.

//바울과 함께 승선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다. 사도행전 27장 1-8절 2020.8.30.
바울과 함께 승선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다. 사도행전 27장 1-8절 2020.8.30.2020-08-30T10:09:5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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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6장 24-32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베스도가 바울의 변론을 듣고 미쳤다고 말한 것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기 전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먼저 상대방의 고정관념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는 내용과 평소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오셔야 했는지, 어떻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는지, 왜 선한 행실이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 등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베스도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는 다른 의미로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미쳐서 살고 있습니다. 어차피 미쳐서 산다면 가장 가치 있는 대상에 미쳐야 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미쳤다는 증거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께 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즉 복음만이 참말이냐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은 일시적인가 영원한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복음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은 단지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진리를 말하기 위해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넷째로, 베스도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복음을 들었어도 믿지 않은 것은 인생 최대의 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인데 우리도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코로나19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첫째,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환난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환난을 대비하여 믿음을 강화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화하려면 ‘3분복음메시지’를 무한 반복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재판을 받은 후 로마로 가기 위해 승선하여 가이사랴를 출항하여 그레데 섬의 미항까지 도착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여러분은 로마로 가기 위해 승선한 바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죄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과 함께 한 자가 있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울과 본서를 기록한 누가와 2절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죄수 바울과 함께 배를 탈 수 있었을까요? 일반적으로 죄수를 호송하는데 일반인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바울과 함께 승선했다는 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는 죄수가 호송되어 갈 때 종을 두 사람까지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서 그들이 바울의 종으로 등록하여 함께 승선한 것입니다. 즉 바울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바울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바울과 함께 갇힌 사람들의 이름 중에 ‘아리스다고’가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골 4:10).

    여러분은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한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저는 우리의 헌신 자세와 그들이 헌신 자세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로 무엇 때문에 헌신합니까? 솔직히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유해지고, 멋있게 살려고 하는 데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예수 때문에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지만 이렇게 헌신의 자세가 전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생의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고 있고, 그들은 천국의 성공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과 끝까지 함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이 훌륭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성경을 보면 바울이 사역 초기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행동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가 요한의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나름대로 단점과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울과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함께해야 할 이유는 이것입니다. 더처치는 D3제자훈련으로 세계 복음화를 이루라는 사명에 목숨을 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바울과 함께 승선한 또 다른 자들을 소개합니다. 다시 1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바울이 탔던 배에 누가와 아리스다고 외에 또 다른 몇몇 죄수들도 함께 탔습니다. ‘몇 죄수’는 어떤 자들일까요? 이 죄수들은 바울과 전혀 다른 자들입니다. 바울은 죄인으로 확정이 안 된 죄수입니다. 즉 피의자 신분의 죄수이고 몇 죄수들은 이미 형이 확정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는 배에 올랐을까요? 당시 로마 정부에서 각 지방에 공문을 내려서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될 사형수를 보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는데 그들이 그 대상자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곧 맹수에게 던져져 죽임을 당할 자로 승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그리고 무엇을 듣습니까? 최고의 복음 전도자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그들 중에 몇이나 구원받았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죽기 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만남을 누가 계획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아시고 육신으로는 끝이지만 영으로는 구원받게 하시려고 바울과 함께 승선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수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고 없이 옵니다. 지금은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복이 되게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몇 명의 죄수에게 바울을 만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코로나19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바울과 몇 죄수를 맡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리오입니다. 율리오의 뜻은 ‘감았다’입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바울과 함께 한 죄수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맡은 자의 이름은 밝히고 있을까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율리오가 처음에는 바울의 견해를 무시했으나 유라굴라 광풍을 만난 후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행 27:10-11, 31-32), 폭풍으로 인해 배가 조난 당해 멜리데 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죄수들이 도망칠 것을 두려워하여 병사들이 모든 자를 죽이려고 했을 때 이를 막아 바울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행 27:41-44). 즉 율리오가 복음 전도자 바울을 구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동역한 자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물론 복음을 대적한 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영원히 기억됩니다. 우리는 복음에 함께하므로 복된 자로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배가 시돈 항에 도착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을 읽습니다.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 바울이 탄 배가 시돈에 도착했습니다. 시돈은 ‘어장’(漁場)이라는 뜻이듯이, 지중해 연안의 해상 교통과 해상 무역, 상업의 중심지로서 페니키아(베니게) 사람들이 세운 대표적 항구 도시입니다. 오늘날은 레바논 공화국에 속하는 인구 5만의 소도시 사이다’(Saida)입니다. 신약 시대에 예수께서 친히 이곳을 방문하여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막 3:8; 눅 6:17),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사도 바울도 로마로 항해하던 중 잠시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돈에 도착하자 율리오가 바울에게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으라고 자유를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시돈에 바울의 친구들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일단 누가가 친구들을 ‘우리’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여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바울이 회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가까이 지내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가능성이 있지만 저는 후자가 훨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13-4절을 읽습니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두로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서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었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은 아주 가깝기 때문에 바울이 두로에 머무는 동안 제자들이 시돈에 있는 친구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바울과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생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평소 편지로 왕래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시돈의 친구들을 만나서 무엇을 했을까요? 본문은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휴식을 취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바울이 단순히 대접을 받기 위해 시돈의 친구들을 만났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로마 황제의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판결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입니다. 즉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친구들을 만났겠습니까? 저는 바울이 그들을 만난 이유를 누가가 그들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말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바울이 두로에 갔을 때는 제자들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돈에서 도착했을 때는 ‘친구’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제자와 친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제자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 관계이고, 친구는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시돈에 있는 자들을 바울의 제자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두로에 왔을 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혹 구원을 받았어도 훈련을 받지 않아 제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하도록 훈련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외형상으로는 친구로 만나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제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친한 관계를 만들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제자 삼는 것이 바로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시돈에서 대접을 받은 후 출항하여 미항에 도착하기까지 과정을 소개합니다. 4-8을 다시 읽습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누가가 항해 과정을 소개하면서 반복해서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간신히’입니다(7절과 8절). 또 27장 16절에도 또 ‘간신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누가가 의도를 갖고 ‘간신히’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누가가 간신히를 반복하여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간신히’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탄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언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될지 모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도를 쉽게 하도록 하시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 엎드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지난주 큐티에서 살펴보았듯이 히스기야가 기도로 15년간 생명을 연장받고, 하룻밤에 앗수르 병사 185,000명이 죽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 일로 교만해져서 바벨론 신하들의 축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무기고와 내탕고를 보여주고 동맹을 체결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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