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그는 누구인가? 막15장 6-15절 20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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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 그는 누구인가? 막15장 6-15절 2012.7.152018-12-03T19:23:3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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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는 ‘바라바’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라바가 누구일까요? 혹 ‘바라바’를 ‘바나바’의 동생으로 생각하는 분이 안계시겠죠? 제가 부목사 시절 후배전도사가 중고등부 설교를 하는데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의 동생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은 형과 동생관계가 아니라 원수지간입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에 지혜롭게 답을 하지 못해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남 유다를 다스린 자가 르호보암이고,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자가 여로보암입니다. 혹자는 바라바를 ‘예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바라바’를 ‘아버지의 아들(Bar Abbas)’, 혹은 ‘랍비의 아들(Bar Rabbi)’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17절에 나오는 바라바를 다른 번역본에서는 ‘바라바 예수’라고 번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캐톨릭과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에서도 ‘바라바’라고 말하지 않고 “바라빠라는 예수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바라바’가 예수님의 아들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결혼을 하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혹 예수께서 결혼을 20세에 하셨다고 해도 어떻게 13세의 어린 나이에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바라바를 예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言語道斷이고 語不成說입니다.

    그러나 혹 바라바를 ‘예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해도 그 ‘예수’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했던 마술사 중에 ‘바 예수’라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행 13:6). 당시 이스라엘에서 ‘예수’는 우리나라의 철수와 영희 정도로 흔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왜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이토록 많이 있었을까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알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식을 낳으면 그가 성장해서 장차 자기 민족을 구원해내는 일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바라바도 그의 부모가 자기 민족을 구원하라는 의미로 ‘바라바 예수’라고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바가 어떤 짓을 했습니까? 민란을 일으켜 사람을 죽이고 강도 짓을 하여 예수님과 같이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십자가에 처형하자니 그렇고, 또 성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민란을 일으켜 총독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백성들의 요구에 무릎을 꿇고 죄인인 바라바는 석방시켜주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극악무도한 죄인이 처형을 당하지 않고 무죄로 석방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바라바가 억세게 운이 좋은 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자입니다. 바라바가 얼마나 행운아 인지를 알기 위해 그의 재판과정을 바라바의 입장에서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폭도이기 때문에 그는 곧 자신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포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과 자신이 빌라도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상치 못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절기 때면 죄수를 한 명 내어주는 전례가 있으니 죄수 한 사람을 내어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바라바가 이 말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가슴이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 자신이 그 중의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제사장들이 무리들을 충동질하여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바라바를 내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바라바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곧 석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희망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묻습니다. “그러면 내가 누구를 내어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러자 무리들은 ‘바라바’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냐?”고 묻습니다. 이에 무리들은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바라바는 살아나고 아무 죄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해방시켜주고 예수님은 사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리는 순간 그는 기뻐 뛰며 환호를 질렀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억세게 운이 좋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유전무죄’라는 말이 있듯이 금권이 작용하면 얼마든지 판결이 뒤집힐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진실이 거짓으로 판결이 나고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극악무도한 죄인이 무죄로 석방되는 재판은 빌라도 법정 외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고 대신 포악한 죄수를 무죄자로 석방이 되었으니 바라바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러나 바라바만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억세게 운이 좋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과 심판의 법에 매여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굴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억세게 운이 좋은 바라바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라바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억세게 운이 좋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구원과 바라바가 받은 구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라바가 받은 구원은 단지 육신의 생명을 연장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만 잠시 더 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을 받은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죽기 전에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사후에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이토록 억세게 운이 좋은 바라바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고 풀려난 바라바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네 곳에서 모두 바라바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대신에 석방이 되었다는 것만 기록하고 있지 풀려난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성경 자체만을 가지고는 석방 후 바라바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의 생각을 빌려보았습니다. 이미 영화로도 나왔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르 라게르크비스트가  ‘바라바’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바라바는 로마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기위해 예수와 함께 감옥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을 당하고, 바라바는 사면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왜 자신을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는지 알 수 없던 바라바는 예수의 처형장에서 예수를 보고, 또 그를 믿는 기독교신자들과 어울리며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그런 것을 이해 할 수가 없었고, 자신이 체포되기 전에 하던 일을 하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 산적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면을 받기전의 바라바가 아니었습니다. 패기도 용기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동료들은 바라바를 미워하자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죄를 범하여 로마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유황 광산에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사하크’라는 기독교인을 만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옵니다. 로마 당국에서 예수를 인정하면 죽이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때에 ‘사하크’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아 처형을 당했지만 바라바는 예수님을 부인하여 다시 한 번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 도시 방화사건에 개입한 혐의로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속의 ‘바라바’를 보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주님을 가까이서 만난다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은 감옥 동기생입니다. 그처럼 가까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제자들 말고는 잠시라도 그렇게 가까이 예수를 만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가까이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구원 받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사실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로 받는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있어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이 책임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바로 이 점이 바라바에게 안타까운 점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까이 만났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일컬어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고 거듭난 것을 가지고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 생활을 해도 주님을 이렇게 만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신앙생활이 너무 행복하고 기쁩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세 번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죽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기도 하고 ‘오마하의 현인’ 이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회를 안 할 수는 없으나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후회할 만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후회할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워렌 버핏은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기회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잘못한 것이 많아도 그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가 잘못한 모든 것이 다 바로잡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빌라도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는 얼마든지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정치적 욕망을 끊지 못하고 세상의 권력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바라바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고의 축복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인격적으로 사귐을 갖고 삶을 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생활에 실패하고, 건강관리에 실패를 해도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은 인생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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