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항상성은 감사제조기입니다. 눅17:11-19 20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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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말씀은 추수감사절 설교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매우 익숙한 본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찾아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본문이 추수감사절 설교에 자주 등장할까요? 사마리아인이 받은 은혜에 감사했듯이 우리도 주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찾아가서 감사한 것은 단지 나병을 고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본문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나병을 치료해 주신 것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함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15-16절과 18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5-16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절)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얼마든지 나은 장소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가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굳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한 주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지만 말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주인노릇을 많이 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시간만큼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주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우리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께 찾아와 감사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16절에서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18절에서는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동족이었지만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기고 짐승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이방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오직 유대인들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만이 최고이고 자신의 생각을 곧 하나님의 생각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입니다. 육적인 교만은 육신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영적인 교만은 영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통해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직 자기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언제’ 예수께서 나아가 감사를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4-16절을 읽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누가는 사마리아인이 고침받은 것을 알고서는 즉시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깨달은 즉시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감사는 따끈해야 합니다. 식은 후에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식은 감사는 진심에서 나오는 감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는 절대로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진심은 자신을 꾸미지 않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는 숨길 수 없습니다. 감사가 늦어진다는 것은 그 감사가 진심이 아니라 형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감사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식적인 감사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진심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없지만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식적인 감사가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고침받은 것을 깨달은 즉시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한 것처럼 우리도 감사를 깨닫고 즉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아홉 명은 나병을 고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주님께 나아가 감사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전에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고침 받은 것이 너무 기뻐서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병은 당시 저주받은 징표였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사회에서 격리되고,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평생을 가족과 격리가 된 채 고통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는 즉시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먼저 가족들에게 달려갔기 때문에 주님께 즉시 찾아와 감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가까이 있는 우리의 자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아주 멋진 장난감을 사주면 그만 장난감에 빠져 장난감을 사주신 부모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로, 평소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빨리 감사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나병환들은 가족과 격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마음이 황폐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에 감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감사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애굽에서 해방받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결국은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종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는데 왜 감사를 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하다가 멸망을 당했을까요? 신분은 바뀌었지만 삶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면서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그들의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병환자도 감사하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불치병을 고침을 받았어도 감사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자세히 읽으면서 그들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고 있듯이 그들이 나병을 고침 받게 된 것은 제사장에게 가던 도중입니다. 물론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일반 제사장이기 때문에 나병환자들이 중앙 성소까지는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든 제사장에게 가던 중에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즉 먼저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먼저 감사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먼저 가족을 만날 것인가? 그런데 아홉 명은 먼저 가족에게 돌아갔고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여기서 ‘돌아와’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글 번역본에는 ‘돌아와’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보다 뒤에 나와 있지만 영어번역본에는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And one of them, when he saw that he was healed, turned back, and with a loud voice glorified God”). 즉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바로 ‘돌아와’입니다. 즉 사마리아인은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했고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경계선을 넘어 주님께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미 주님께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마음이 높아져있음을 깨닫고 주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들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뒤 내용을 살펴볼 때에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감사와 믿음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고, 또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사마리아인은 가졌던 믿음을 잃지 않았고, 아홉 명은 가졌던 믿음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처음에는 나병환자 열 명 모두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 모두가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를 높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홉 사람은 나병을 고침 받고 나자 그 믿음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나병을 고침받은 아홉 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매어달려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해결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졌던 믿음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는 전천후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소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목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한평생을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신사참배에 불복함으로 6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8.15광복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맙니다. 그는 애양원에서 기도를 하던 중,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서 그 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뜻이 있어서 제 아들 둘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는 모인 많은 조객들 앞에서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10가지 감사 이유를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가 두 아들을 잃고서도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구원의 내용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본문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NIV성경은 “Then he said to him, “Rise and go; your faith has made you well.”라고 번역하고 있고, KJV는 “And he said unto him, Arise, go thy way: thy faith hath made thee whole.” 영어 성경으로 보면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가 나병을 고침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본문의 ‘구원’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죄에서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 때문에 그가 나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마리아인이 나병을 고침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를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것은 그가 믿음을 유지하신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열 명도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지만 곧 바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홉명은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께 나아왔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 ‘Thank’는 생각 ’Think’에서 왔듯이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만 바꾸면 즉 믿음을 가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없고, 없고, 없고, 또 없을 지라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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