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더하소서 눅17장 5-10절 20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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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더하소서 눅17장 5-10절 2017.9.32018-12-03T23:32: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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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간청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청은 다소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벌써 삼년 반이라는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수많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셨고, 걷지 못하는 자를 다시 걷게 하셨고,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했기 때문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왜 그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누가복음 17장 1-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누가복음 17장 1-4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실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습니까? 더군다나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역시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마치 동전의 옆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과 순종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외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기도하지만 사람에게는 용서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제자들처럼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문자적으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명령한 대로 다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여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제자들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께서 믿음을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마태복음 17장 14-20절에도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지만 고치지를 못하자 예수께서 이를 보시고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이 즉시 나감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곁에서 이것을 보면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도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제자들이 믿음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셨는지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려면 먼저 앞 절의 말씀과 5절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앞절과 5절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제자들이 용서하지 않은 것과 관련있습니다. 즉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면 용서해주어야 하는데 제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용서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용서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왜 믿음과 용서가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어떤 자들을 용서했습니까? 자기를 돈 받고 애굽으로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을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는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형제들을 용서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를 용서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13년간을 쫓았던 사울 왕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인이 죽이려고 좇아다녔으니 얼마나 상처가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일 기회가 많았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누구를 용서했습니까? 자기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용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믿음이 용서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믿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앞 절과 5절을 분리해서 해석한다면 6절을 다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책망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을 칭찬하신 경우가 나오고 책망하신 경우가 각각 나옵니다. 그런데 언제 칭찬과 책망을 하셨습니까? 그들이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실 경우는 칭찬하셨고,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실 경우는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하나님께 칭찬을 받기도 하고 책망을 받는 근거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금보다 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7-10절을 읽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겉으로 볼 때는 겨자씨 믿음과 ‘종의 비유’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7절이 ‘But’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는 상반접속사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종의 비유’를 겨자씨 믿음과 상관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키를 1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한마디로 종은 주인이 시킨 대로 일을 해야 하듯이, 우리도 주님의 명령에 오직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모든 명령에 종의 자세로 순종해야 합니다. 종의 자세를 갖지 아니하면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덧붙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순종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종의 비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종이 낮에 밭을 갈고 양을 쳐서 수고를 많이 해서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수고했으니 좀 쉬어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종이 밖에서 그렇게 수고를 했어도 주인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또한 주인이 밥을 먹는 동안에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순종하고도 자신을 인정해달라거나 순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즉 항상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각종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주의 일을 행했다고 마음이 높아지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겸손한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왜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만 무익할 종일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입술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능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는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를 무한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날 믿음의 용사로 잘 알려진 파스칼에게 그의 친구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믿음을 갖고 싶네. 그래서 자네처럼 살고 싶네.” 그러자 파스칼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먼저 나처럼 살아야하네. 그러면 나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될 걸세.”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이 없이는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대로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용서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겸손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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