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행 1장 1-5 20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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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행 1장 1-5 2018.9.92018-12-03T23:56:1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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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수년간 강해한 누가복음을 마치고 어느 책을 강해할지를 생각하던 중 사도행전을 강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더처치는 또 다른 사도행전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 ‘내가 먼저 쓴 글’이라는 것은 누가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권이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이를 가르는 분수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승천입니다. 즉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고, 사도행전에는 승천하신 이후에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영으로 다시 오신 성령께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을 통하여 본 서신의 수신자가 ‘데오빌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와 사랑을 뜻하는 ‘필로’가 합쳐진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가 그를 ‘각하’라고 호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로마의 고위관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 황제와 사촌지간이라고 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술하기 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늘에 올라가시지 않고 40일 동안 계시면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간략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3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을 많은 증거로 설득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에 증인이 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에게 복음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이 땅에 40일간 계시면서 왜 로마제국의 정치나 경제나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로마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제국과 하나님 나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은 아무리 강대하게 보일지라도 곧 무너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나라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가 아무리 찬란하게 보일지라도 곧 무너지지만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 나라보다 하나님 나라의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나라는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만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에 관한 것일 뿐입니다. 즉 먼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지, 이 세상 나라의 일을 소홀히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모두 소중한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의해 장차 천국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그들에게 남기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장 3절을 읽습니다. “…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앞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복음전파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 28-30절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예수께서도 이미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구약성경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후입니다. 즉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듯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도 반드시 보내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이 이르자 성령께서 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말하면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줄 믿고 기도하지만 아직도 응답이 없어서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고 상황만 보고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기도의 응답이 늦어져서 낙심할 때에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찬송가 539장을 개사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없다고 그렇게 낙심 말아라. 만사에 때가 있나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신실한 약속 붙잡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우리는 지금 상대방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동안 ‘손가락 4중 잠금 장치’가 유행했던 것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서로 약속한 것을 지키겠다는 표시로 처음에는 새끼손가락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새끼손가락을 건 후에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더니 도장을 찍은 후에 서로 손바닥을 맞대면서 ‘복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복사한 뒤에는 손바닥에 사인하는 절차를 추가했습니다. 왜 이렇게 약속을 보증하는 절차가 복잡해져 갔습니까? 서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는 주로 장로교 측에서는 주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한 자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다른 하나는 물세례를 받은 후 성령세례를 별도로 받는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는 오순절 계통에서 주로 주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미 제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인데 예수께서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는 맞고 어느 하나는 틀린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어떤 신학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릅니다.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하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체험이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께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오순절이 되자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5, 2:1-4). 이런 견해를 취하는 자들은 주로 오순절 계통의 신학자들을 포함하여 토레이(R.A. Torrey)나 브루스(F.F. Bruce)등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둘을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과거형태의 동사를 사용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의 동사는 현재적으로 성령께서 믿는 자의 마음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박형룡 박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견해와 다른 제삼의 견해를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주장할까요? 먼저, 성령충만과 성령세례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약속하셨는데 오순절에 약속대로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세례는 단회적인데 반하여 성령충만은 다회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세례는 한 번 받지만 성령충만은 계속해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대통령 취임식을 한 번 하지만 계속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실제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까요?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하여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또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제자 삼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토록 무기력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기 전과 그 후는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로부터 40일 간 하늘나라의 일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나가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겠다고 하자 다른 제자들도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요 21:3).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없고 복음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아도 세상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 운동가였던 ‘찰스 피니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된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제목을 살펴보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기도제목을 바꿔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을지라도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복음을 증거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인데, 복음을 증거하면 함께 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단지 성령을 달라고 기도만 하지 말고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제가 만든 것이 바로 ‘3분복음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10번씩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하면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증거하게 되고, 복음을 증거할 때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며 할 수 있었던 것도 사도들이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도록 사도들로부터 훈련받아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쳐 제자 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 증거자로 불러주셨는데, 성령의 충만과 복음증거는 서로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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