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때문에 울고 있나요 누가복음 23장 26-31절 2018.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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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때문에 울고 있나요 누가복음 23장 26-31절 2018.7.222018-12-03T23:52: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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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23장 26-31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2018.7.22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26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왜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예수님을 따르게 했을까요? 예수께서 너무 지치셔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시고는 골고다 언덕까지 가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그들이 예수님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알면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게 한 자들을 로마군인이라고 말하지만, 누가복음은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백성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로마군인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해석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자비를 베푼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백성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면 그것은 자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그들의 최종 목표로 삼았는데,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다가 중도에 죽으시게 되거나 빨리 가지 않으면 안식일 전에 사형집행을 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우게 한 것은 예수님에게 긍휼을 베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자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권모술수에 능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누구 안에 처해있습니까? 요한 일서 5장 19절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말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6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본문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시몬이 구레네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가 시골에서 올라오는 중에 붙들어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를 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을 읽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우리는 누가복음 23장 26절과 마가복음 15장 21절의 말씀을 통하여 구레네 시몬이 어떻게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곳을 지나가다가 그의 뜻과 상관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표현하면 재수가 없어서 십자가를 억울하게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이 정말 재수가 없어서 억울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여 지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짐으로 받은 복이 무엇인지는 로마서 16장 13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바울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루포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레네 시몬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온 가족이 구원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루포는 종종 자녀들에게 “얘들아, 너희 할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덕분에 우리 가정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가족이 바울과 영적으로 매울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구레네 시몬의 12대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원치 않지만 여러분이 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것을 감내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지면 엄청난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알면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기간이 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구레네 시몬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약 800미터입니다.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하는데 ‘슬픔의 길’, 또는 ‘고난의 길’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4km를 걷는 데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800미터는 4Km의 1/5에 해당되니까 약 12분이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이 그냥 걷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메고 걸었기 때문에 이보다는 좀 더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배나 더 걸렸다 할지라도 24분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구레네 시몬이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짊어진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부터 짊어졌기 때문에 아마도 십자가를 대신 진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렇게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간은 짧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온전히 깨닫는다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실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7절을 읽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백성과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따랐던 자들은 크게 두 그룹이었습니다. 하나는 백성이고, 다른 하나는 큰 무리의 여자들입니다. 넓게는 큰 무리의 여자도 백성에 속하지만 누가가 이렇게 둘로 구분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단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였고, 큰 무리의 여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러 가시는 것을 안타까워하기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자세로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예수께서 자신을 생각하여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29-31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재앙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재앙이 얼마나 혹독한지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9절입니다. 당시는 자녀를 낳지 못하면 저주받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장차 굉장히 무서운 재앙을 당하지만 그것을 당하는 자녀들이 없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30절입니다.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위기를 만날 때 사용하는 말인데,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푸른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마른나무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데 예수께서 의인이심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고난을 당하시는데 죄인들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에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너무 혹독한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환난을 당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로마군이 포위하던 중 잠시 후퇴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때가 유월절인데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물리쳐주셨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는데 로마군대가 다시 포위해서 198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0년 가깝게 흩어져 살면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온갖 미움과 박해를 당했고, 심지어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대인처럼 박해를 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당할 환난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만 당할 환난을 아시고 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화를 당할 것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장차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신자에게 임할 환난은 이루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지옥인데 그곳의 고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께서 고통 당하는 것을 인하여 울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임할 환난을 생각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라는 것은 헬라어로 ‘클라이에테’(클라이오의 명령형)라고 하는데 이는 슬픔을 참으며 억제하는 흐느낌이 아니라, 마치 문제를 당한 사람이 소리 내어 크게 울부짖는 듯한 큰 소리를 내어 울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장차 당할 환난을 인하여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현재의 고통보다 장차 임할 환난을 인하여 울며 간구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장차 임할 환난은 지금까지의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듯이, 지금의 고통은 장차 우리가 당할 환난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장차 당할 환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성경 구절을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 26절을 읽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얼마나 장차 임할 환난이 무서우면 그를 인하여 무서워 기절을 하겠습니까? 장차 임할 환난은 전무후무한 환난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를 위해 기도하면 주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마태복음 24장 15-22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한마디로 기도하면 그날에 당할 환난을 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믿고 기도하므로 예루살렘의 멸망 중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주후 68년부터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유대인들이 매일 드리던 제사를 폐지하고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제단에 얹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 중에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기도했더니 로마의 네로 황제가 갑자기 자살하여 베스파니안 장군이 황제의 뒤를 잇게 되어 잠시 물러가므로 죽음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유대에 있는 자들은 도망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사도들의 지도 아래 약 2만 여명이 예루살렘을 피해 깊은 산속의 동굴로 피해 살아남았습니다. 반면에 함께 떠나자고 권했지만 하나님께서 적을 물리쳐 주셨는데 왜 떠나느냐며 거절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웁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우는 이유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보다는 영적인 문제를 인하여 울어야 합니다. 지금의 고통보다는 영원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울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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