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신과 소통하라 시 42:5 2012.9.2

//먼저, 자신과 소통하라 시 42:5 2012.9.2
먼저, 자신과 소통하라 시 42:5 2012.9.22018-12-03T19:49:59+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먼저, 자신과 소통하라 시 42:5 2012.9.2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5

       우리는 ’11월 4일, ‘소통’을 주제로 제2차 총동원전도행사인 ‘D3행복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도축제는 여러 측면에서 지난 번과는 다르게 진행합니다. 첫째로, 1차 D3행복축제에는 교회 홍보차원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초청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번에는 등록 가능한 사람을 작정하고 전도합니다. 둘째로, 1차 D3행복축제에서는 4팀으로 나누어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구역별로 진행합니다. 셋째로, 1차 D3행복축제 때는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번에는 ‘소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 동안 웰빙이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지만 요즈음은 소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소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선주자 가운데 안철수씨가 20-30대를 중심으로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힐링캠프’라는 TV프로와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통하여 젊은이들과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소통은 서로 간에 오해가 없이 대화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할까요?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소통을 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즉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소통의 반대말은 불통입니다. 무엇이든지 통하지 않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불통으로 사는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하지 못한 것은 소통하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11월 4일은 ‘소통으로 행복한 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이번 행사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소통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과의 소통, 둘째는 이웃과의 소통, 셋째는 세상과의 소통, 넷째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자신과의 소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통은 주로 외부외의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과의 소통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통은 먼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너무나 많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내가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내가 있고, 적극적인 내가 있는가 하면 소극적인 내가 있고, 불행한 내가 있는가 하면 행복한 내가 있고, 게으른 내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내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어떤 측면에서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대답하면 누구의 아들과 딸이고, 누구의 남편과 아내이고, 누구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대답한다면, 누구의 친구이고, 어느 회사의 대표이고, 어느 회사의 상사와 부하이고, 누구의 선생과 제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철학적인 측면에서 대답하면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소통하는 존재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소통하는 존재로 인식할 때에 가장 먼저 누구와 소통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외부와 소통하시기 전 먼저 하나님 자신과 소통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삼위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말합니다. 즉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소통하시고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신과 먼저 소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한국 최고의 소통전문가로 알려진 김창옥씨는 ‘유쾌한 소통의 법칙 67’이라는 책에서 남들과 소통하기 전에 우선 나 자신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과의 소통은 모든 소통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소통하는 존재임을 알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로, 자신을 관대하게 대해야 합니다. 자신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을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을 대하듯이 남을 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있지만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 동정하기 보다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은 시집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한동안 여자가 시집을 가서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집살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킵니까? 시집살이를 경험을 한 시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고생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동정하지 않고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킬까요? 그것은 고통을 당하면서 마음이 강팍해져서 자신과의 소통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 안에 자신의 생각조차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미 굳어진 생각에 갇혀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도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율법대로 살 수 있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율법대로 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움츠러듭니다. 마음이 움츠러들면 생각의 폭이 매우 좁아져 다른 생각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서 자신과 소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마구 깎아내리고 비판하였던 것은 자신을 관대하게 대하지 않음으로 자신과의 소통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자신과 소통할 수 있지 딱딱하면 소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관대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도록 회개와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혹 잘못을 하면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하나님과 소통의 길이 열리듯이, 자신을 용서할 때에 자신과 소통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신 것만 믿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해결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책감을 가지면 자신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회개와 관련하여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유다는 목 메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바로 자신을 용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울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이켰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하기까지 자기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남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굴이 몹시 따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용서하고 실패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목매달아 죽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듯이 우리의 죄를 스스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동과 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예수님을 거짓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거짓 메시야가 아니라 진짜 메시야인 줄 알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그리스도인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기 때문에 얼마동안은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죄책감을 해결하고 주님을 위해 그토록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어 마땅한 자신을 용서하셨듯이, 자신이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용서하심으로 자신과 소통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을 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함께 모였습니다.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은 다른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에게 고백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주 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무슨 말입니까? 시인은 자신 스스로에게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자신에게 소망을 주는 말을 건네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땀 흘리며 헌신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몰라줄 때에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래 참 잘했어, 수고 많이 했어, 너는 복 받을거야!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 가족 때문에 제대로 돈을 쓰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재미있는 영화도 보고, 여행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면 자기 자신과 소통하게 되어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들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더욱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일의 나치스들이 유태인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치스들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맨 정신으로는 사람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치스들이 유태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있습니다. 나치스는 유태인들의 수용소에 화장실을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버리고 하루에 한 컵의 물만 주고 그 물로 하루를 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컵의 물로 씻고 마시는 것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났을까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으므로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누군가 늘 먼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변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수용소 아무데나 배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한 컵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씻지 못하자 썩은 냄새가 나고 겉으로 보기에도 짐승만도 못하게 보였습니다. 즉 자기 사랑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나치스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치스들이 차마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신을 사랑하여 끝까지 단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컵의 물로도 언제나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또 깨진 유리조각으로 수염도 늘 깎아 단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자신과 소통할 수 있고 자신과 소통해야 자존감을 갖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행복은 소통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먼저 소통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과 먼저 소통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자신에게 관대해야 하고, 자신을 용서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과 소통함으로 행복의 기초를 쌓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