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절은 감사절입니다. 눅17:11-19 20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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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은 감사절입니다. 눅17:11-19 2014.7.62018-12-03T21:51: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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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3대 절기 즉,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오순절,칠칠절), 수장절(초막절, 장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탈출한 것을 기념하여 아빕월(1)에 지키는 해방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곡물 중에 첫 수확물인 보리 거두기를 마치고 첫 곡식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유월절로부터 칠주(49)가 지난 그 다음날 50일째 되는 날에 지킨다 하여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며 방황했던 그 고난의 경험을 기억하며 현재의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세 절기 중에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절기는 맥추절입니다.

       우리가 맥추절을 지키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시대에 살고 있지도 않는데 맥추절을 지켜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 구약성경 출애굽기 2314-17이나 신명기 16:9-12에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구약성경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까요? 만일 그런 이유로 각종 절기를 지켜야 한다면 맥추절만 아니라 각종 제사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각종 절기를 지키고 각종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조차도 성경대로 절기를 지키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속죄일(욤 키푸르)에 금식과 속죄기도를 드리며 제사대신 모든 백성의 죄를 수염소에게 안수하여 짊어지게 하고 수염소를 광야로 쫒아 보내는 의식을 통하여 속죄합니다. 하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이 구약성경이 명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각종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우리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다섯 제사제도와 일곱 절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5대 제사 뿐만 아니라 7대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맥추절을 지키고 있을까요? 그것은 맥추절의 핵심 가치가 첫 수확에 대한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맥추절이 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항상 하나님께는 감사한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맥추절을 신약시대에도 지키는 것입니다. 제가 맥추절을 첫 수확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절기라고 하니까 여러분 중에는 혹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데 굳이 맥추절을 지켜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이나 감사절기이지만 감사의 내용이 다소 다릅니다.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의 감사를 드리는 절기인 반면에 맥추절은 상반기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맥추절은 감사절입니다라고 정한 것입니다.

     

       오늘 맥추절을 맞이하여 감사와 관련하여 어떤 말씀을 전할지를 고민하다가 방금 읽은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읽던 중 왜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는지를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성경은 그 마을이 정확히 어떤 마을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서서예수님께 간청한 것으로 보아 나병환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로 추정됩니다. 나병환자들은 평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터라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자 멀리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여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나병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것을 확인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아직 낫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고침 받은 것을 믿고 제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영역과 감사의 영역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나병환자들은 모두 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큰 믿음이 없었다면 주님께 고쳐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주님께 나아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감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를 보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감사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감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그토록 좋은 상황을 맞이했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지 않는 상황에 있지만 감사하고 좋은 상황이지만 불평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살전 5:18).

     

       그런데 왜 나병을 고침 받은 아홉 사람은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침 받은 자들이 감사하지 않은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고침 받은 후 주님께 감사하러 나온 자는 이방인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감사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방인은 감사했는데 유대인들은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병 고침을 받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받아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누리는 것에 조금도 자신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얻은 결과에 대해 0.001%도 자신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온전히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감사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무엇이 감사의 수준을 결정할까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구원 받을 만한 요소가 자신에게는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일에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다고 믿습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어느 사도보다 수고를 많이 했지만 늘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수고하지 않고주님의 은혜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할 때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여대생이 의학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피곤할 때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하면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녀의 마약 복용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수입이 없게 되자 마약조차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비오는 어느 날 저녁, 더 이상 사는 것이 무의하다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기 전, 지금껏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하려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마약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어려움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약에서 해방된 것은 그녀의 결단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축복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주님의 은혜임을 깨달을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때나 형통한 때나, 기쁜 때나 슬플 때나 주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늘 감사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떻게 이방인 나병환자가 감사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은 고침을 받았어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주님께 나아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이 고침 받은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그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과거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나병을 고침 받기 전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족과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고독으로부터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살이 문드러져서 털, 여린 귀, 코가 떨어져 나가므로 괴물인간이 되어 자신도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16: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이 과거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애굽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굶고 헐벗고 고역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인권유린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짐승같이 살았습니다. 그런 고통에서 건짐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저와 여러분이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구원 받기 전,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었고, 저주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운명에 놓여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만 바라보며 살던 소망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사소한 일로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기 전, 우리의 운명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나병에 관한한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폴 브랜드 박사가 있습니다. 루이지애나의 나병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가 하루는 출장을 가서 호텔에서 양말을 벗는데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항상 나병환자를 대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병의 첫 증상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순간적으로 혹시 자기가 나병에 전염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얼른 일어나서 핀을 찾아서 자신의 복숭아뼈 밑 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이 찔러보았지만 피는 나지만 여전히 감각이 없었습니다. 나병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순간 폴 박사는 평생 나병환자로 살아간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서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에 다시 한 번 어제 핀으로 찔렀던 복숭아뼈 밑 부분을 푹 눌러서 쑤셨습니다. 순간 기절할 듯한 아픔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전날 밤, 핀으로 찔러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은 장시간의 비행기와 기차여행으로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일시적으로 발에 마비상태가 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그날의 고통을 기억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 ‘바로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나은 것을 보고서 즉시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하였습니다(15-16). 그는 감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 즉시 감사했습니다. 사실 고침 받은 아홉 명도 왜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고침을 받는 순간은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감사하지 않자 영원히 감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즉시 해야 합니다. 포도주는 시간이 흐를수록 맛이 깊어지지만 감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사라집니다. 음식도 식으면 맛이 없듯이 감사도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옆의 분과 감사의 인사를 나눕시다. “식기 전, 감사합시다.” 슈바이처 박사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컸지만 그때마다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며 자랐다.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었지만 감사표현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배경도 있었다. 나를 도와준 분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충분히 감사를 표현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감사표현은 잠시도 주저하거나 보류해 둘 것이 아니다. 곧바로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한다.” 혹 감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는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감사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즉시 할 때에 감사한 일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로, 감사한 마음을 밖으로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치유 받은 것을 깨닫고 그 기쁨을 자신 안에만 가두어두지 않았습니다. 예수께 즉시 찾아가 엎드려 그 기쁨을 감사로 표현했습니다(16). 그렇습니다. 감사는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마음속으로 감사한다고 해도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감사를 표현하지 않음으로 오해가 빚어져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상대방이 당연히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하지 않으면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 관계에 금이 갑니다. 감사를 마음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밖으로 표현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배울 것은 그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연발하는 것입니다. 어느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교회에서 행복한 가정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훈련을 받았는데 하루는 훈련자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졸업을 할 수 없다는 말에 고민하다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아내 뒤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뒤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자 그 순간 아내를 확 끌어안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한 데이“. 그러자 깜짝 놀란 아내가 뭐꼬~”라고 하자, 방으로 도망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숙제다~ …내 참,,,,,” 우리 안에 숨어있는 감사를 끄집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함께 19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 여기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의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구원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육체적인 구원입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구원을 받은 열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주님께 나아와 감사를 함으로 얻은 구원은 영적인 구원입니다. 즉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2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자에게 또 다른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더 큰 감사꺼리를 주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맥추절은 상반기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우리가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은혜를 찾아 감사하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이 찾아오지만 은혜를 찾아 감사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므로 큰 것을 받고, 부족한 것에 감사하므로 풍성해지고, 고통 중에 감사하므로 평안을 맛보고, 있는 중에 감사하므로 받은 것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상반기 동안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찾아내서 감사하므로 여러분의 후반기 삶이 더욱 더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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