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있습니다. 눅6:39-49 20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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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6:37-49 먼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2016년 1월 17일

    우리는 마태복음 5장–7장을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설교라고 하는 이유는 그 설교를 산에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산에서만 설교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평지에서도 하셨습니다. 평지에서 하신 설교를 평지설교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평지설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결론은 네 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 개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비유입니다. 39-40절을 읽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여기서 앞에 나오는 맹인(盲人)은 진리를 분변치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를 뜻하고 뒤에 나오는 맹인은 그들에게 인도를 받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종교지도자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알지 못하고 형식과 외식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배척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너무 몰랐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문제투성이인데 그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문제만 지적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하므로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떻게 자신을 살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영혼의 거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사용합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못 생기면 못 생긴 대로, 잘 생기면 잘 생긴 대로 보여줍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공주가 계모 왕비의 시샘을 받아 숲으로 쫓겨나 금광을 캐며 사는 일곱 난장이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는데, 계모 왕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주를 죽이려다 결국 독이 든 사과를 먹여 깊은 잠에 빠뜨리지만 왕자가 나타나 공주를 깨우고 계모 왕비는 벌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중에서 거울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비는 백설공주를 숲 속으로 쫓아내고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진실의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가며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열심히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거울에게 물어보았지만 거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인은 백설공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거울은 항상 보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거울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여주지 속 모습은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를 보기 위해서는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 속까지 꿰뚫는 능력의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자신의 참 모습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지, 미숙한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말씀에 합당치 않은 삶이 드러나면 고쳐야 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소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먼저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세상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눈 속에 있는 들보와 티의 비유입니다. 41-42절을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의 눈에는 들보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티와 들보는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먼저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큰 죄인임에도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마음이 교만해져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다른 사람의 잘못이 크게 보인다면 자신이 교만한 상태에 있음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한 동안 ‘내 탓이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천주교에서 시작했지만 아주 잘한 운동입니다.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데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에게 ‘내 탓이요’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대화하기 힘들어지자 그 원인이 아내의 귀에 문제가 있어 그럴 것이라 단정하고, 아내를 테스트해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방 한쪽 끝에 앉아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내 말 들려요?” 그러자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다시 물었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같은 말을 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바로 뒤로 가서 “이제, 내 말이 들리나요?”하고 말하자, 아내는 짜증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들린다고 네 번이나 대답했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귀에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내의 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가 더 큰데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나무와 열매의 비유입니다. 43-45절을 함께 읽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이 말씀은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과 연합하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여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성찰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았을지라도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자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사람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 방탕과 그와 같은 것”(갈 5:19)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을 토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넷째로, 두 건축자의 비유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6-49절)
    예수께서는 설교를 마무리하시면서 왜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행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 여러분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기 전 까지는 별로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말씀이 바로 저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지난주에 제가 한 설교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딸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밤에 일찍 자라”, “살을 빼라”, “책 좀 읽으라”, “매일 큐티를 해라”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만 말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발, 제 말 좀 들으라고 꾸짖습니다. 이렇게 제 딸이 제 말에 불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저의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중에 이 말씀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관심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지키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고 듣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열심히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다양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이수하기도 하고, 기독교 관련서적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듣는 데에서 말씀을 지키는 쪽으로 관심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삶의 적용에 실패하는 것은 바로 묵상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씀에 은혜를 받아도 묵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삶으로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말씀 묵상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시편기자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7-4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7-49절)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집을 지을 때에 주추를 반석위에 놓는 것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자는 마치 집을 지을 때에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아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지만,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으면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히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인생은 그 마지막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날에 웃는 자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대로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반석위에 주추를 놓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어려울까요?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의 성공을 보장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위에 인생의 집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이 하라면 하고 말씀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해외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고 그가 바로 영원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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