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6차 로마서강해 12장 14-21절 202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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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6차 로마서강해 12장 14-21절 2021.7.112021-07-20T08:38:4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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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29-13을 통해서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100% 희생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죽으신 것을 어떻게 거짓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거짓인 것은 상대방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선에 속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악을 혐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을 혐오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는 것이므로 선에 속할 수 없습니다. 선에 속하려면 아직도 합리화하고 버리지 못한 죄와 잘못을 청산해야 합니다.

    셋째로, 서로는 우애하고 존경하라고 할 때는 모두 사용했는데, ‘먼저는 존경하라고 할 때만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므로 ‘우애’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은 일반적으로 수직적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에서는 먼저 누군가가 존경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존경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자이기에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하는데,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가 내린 게으름의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가장 본질적이거나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다른 걸 하기에 바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관심을 가지 않고 다른 것에 목숨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른 것입니다.

    다섯째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섯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로,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하고, 둘째로, 환난 중에 참아야 하고, 셋째로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하고, 넷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야 하고, 다섯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한 후, 이 중에서 한 가지만 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소망하므로 마음이 즐거우면 다른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고, 염려와 걱정을 하고,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두므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관계가 불편한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4을 읽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기초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8). 박해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박해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잘못이나 죄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는 것은 박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박해하는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도 힘듭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갖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마태복음 1012-13을 읽겠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예수께서 일단 어느 집에 들어가면 우선 평안하기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인사법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안을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평안을 빌라고 하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상대방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빈 복이 그 사람에게 임하지만, 만일 합당하지 못하면 빈 복이 복을 빈자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저주했는데 상대가 그 저주를 받기에 합당하면 그 사람이 저주를 받지만, 만일 합당하지 않다면 그 저주가 저주한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하고 싶어도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사람을 미워해서 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는데, 그에게 일어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아주 재미난 일을 소개하겠습니다.)

     

    15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은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까?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전자가 훨씬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일반적으로 성공했을 때 느끼는 감정인데,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시 16을 읽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여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조화를 서로 이룬다는 뜻입니다. 즉 외적인 조건, 즉 학력, 재물, 외모 등을 이유로 구분하지 말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않으면 됩니다. 한마디로 겸손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지 않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17절을 읽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여기서 ‘도모하라’는 말은 언제든지 선한 일이 되도록 우리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선을 도모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게다가 더 우리를 기죽이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모든 사람 앞에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상대를 불문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탈리오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이므로 육신의 본성에 따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역류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에 세상을 역류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18절을 읽습니다.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 말씀은 평화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과도 다투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과 양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인 우리와 화목하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삭이 화평의 대명사가 되었습니까? 아말렉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려고 할 때 다투지 않고 두 번이나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화목하지 못하고 다투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4:2)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양보하고 희생하면 다투지 않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13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화목은 명령입니다. 화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화목해야 할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화목하지 못하면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으로는 화목하지 못하면 전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화목하지 않는 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제자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19을 살펴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원치 않게 대적을 만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고, 바울도 가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자기 집안 식구들이 원수”(10:36)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성경은 심판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전 12:14). 즉 우리에게는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원수를 직접 갚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친히 갚을 권한을 주시지 않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게 하면 더 큰 악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욕심은 단지 소유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인생의 전 영역에 영향에 미칩니다. 만일 원수를 욕심으로 갚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갚아 주려고 합니다. 중국영화를 보면 대부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에 들어가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죽여야 할 원수만 죽이지 않고 그의 가족과 부하들까지 죽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자녀가 남았다면 또 그가 성장하여 자기의 부모를 죽인 자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을 때 예수께서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원수 갚는 것을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다시 20-21을 읽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은 원수를 친히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잠언 2521-22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이 말씀에서 숯불을 사람 머리에 놓는다는 것이 원수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뉘우친 것을 공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숯불이 담긴 화로를 그의 머리에 놓고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때 얼마나 수치를 느끼겠습니까? 즉 ‘숯불’은 그 사람의 수치심과 죄책감의 타오르는 고통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는 최고의 방법은 직접 심판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김구 선생을 죽이려고 권총을 숨기고 오다가 독립군에게 발각되어서 김구 선생에게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이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얼싸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객지에서 또 우리 조국 동포를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이 김구를 만나러 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너무나 감사합니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 맨발로 뛰어나와서 반갑다고 끌어안고 뺨을 비비는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고 김구 선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핍박자에서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이 가장 설교하기 힘들어하는 구절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예화를 새겨들으면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도 캘커타에 죽음의 집이 있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둔 아이들을 테레사 수녀가 데려다가 돌보아주다가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게 돕는 곳입니다. 저도 인도 캘커타에 갔을 때 원장님과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미국 상원의원인 마크 해트필드가 방문하여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다 지시나요?”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의원님, 저는 성공하려고 부름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힘든 일을 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세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직접 원수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삼상 26:8-12).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특별히 사랑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즉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 순종하기 전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자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도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 가서 용서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실천하는 자라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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