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5차 로마서강해 12장 9-13절 20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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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5차 로마서강해 12장 9-13절 2021.7.42021-07-04T14:27: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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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23-8을 통해서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교회 안에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서로 비교하므로 열등감과 우월감을 갖게 되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비교는 동종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전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몸의 각 지체가 절대적인 가치가 있듯이 우리 모두 교회에서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에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자신을 절대적으로 인식할 때 주의할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암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몸에서 어느 한 세포가 커진 것입니다. 암이 온몸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가듯이, 자신을 지나치게 절대적으로 인식하면 교회에 각종 문제를 만들어내고 치명타를 입힙니다.

    셋째로, 성경은 지체 의식을 갖고 서로 돌아보라고 말씀하는데, 왜 우리는 지체 의식을 갖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평신도는 말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평신도가 사역을 해야 지체 의식을 갖고 서로를 돌아보게 되는데 사역을 목회자 중심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받은 은사를 사용할 때 특별히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므로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갑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패망에 이르기에 받은 은사를 사용할 때는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9을 보십시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에로스(육체적 사랑), 스톨게(가족간의 사랑), 필리아(친구 간의 사랑), 아가페(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것은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입니다. 왜 아가페 사랑은 거짓이 없을까요? 아가페적 사랑은 100% 희생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참 사랑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자체만 해도 희생인데, 목숨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희생를 치루지 않고는 아가페적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가페적 사랑은 거짓으로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희생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사랑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웅장하고, 목사의 설교가 유창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희생을 해야 좋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했는데 왜 오늘날은 점점 사랑을 찾아보기 힘드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지체의식이 있었고 지금은 지체의식이 약화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지체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서 서로를 희생하고 섬깁니다. 우리 교회가 거짓이 없는 사랑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더처치 안에 거짓이 없는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한 후, 곧이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합니다. KJV은 이를 악한 것을 혐오하고 선한 것에 매달려라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악한 것을 혐오하려면 먼저 악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악을 한마디로 ‘편리한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편리한 합리주의자는 책임을 지지 않고 자기를 변명하는데 바쁩니다. 에덴동산으로 가보십시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어떻게 했습니까?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고, 하와는 뱀에게 전가했습니다. 이렇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후손이라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데 매우 익숙합니다. 혹자는 잘못하고서도 “하나님도 자신의 입장이 되면 이해하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왜 나만 같고 그러느냐”고 합니다. 심지어 혹자는 상황 윤리를 내세워 성경까지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악을 절대로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것을 혐오하지 않으면 선한 것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정직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선에 속하면 악은 자동적으로 물러갑니다.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하면 어둠은 즉시 물러갑니다. 인도의 간디는 내가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해서 평생을 바쳐 살아가는 이 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더처치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려면 모든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매달려야 합니다.

     

    10을 보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이 구절은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애’는 헬라어로 필로스톨고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헬라 문헌에는 자주 나오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이 단어는 특히 가족 간의 ‘지극한 애정’을 나타낼 때 사용됐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므로 성도들 간에 지극한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먼저존경하라고 말합니다. 존경하기를 ‘먼저’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존경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상대방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존경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우애하라’고 할 때와 ‘존경하라’고 할 때 모두 사용했지만, ‘먼저’는 ‘우애하라’고 할 때는 사용하지 않고, 존경하라고 할 때만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이므로 ‘우애’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만, 존경은 누군가 먼저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존경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먼저 존경할 수 있느냐.” 그런데 존경할 것이 없어도 상대방을 존경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를 대할 때마다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11절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섬길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다시 읽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두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게으르다'(오크네로)는 원어로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잠 6:6,9: 마 25:26). 혹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거나 들어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책 저자가 로버트 기요사키입니다. 그가 지난주 수요일, 인터넷 매체에서 글로벌 금융시장 붕괴를 경고하면서 금, 은과 비트코인을 구매하라고 권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게으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신의 가장 본질적이거나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다른 걸 하기에 바쁜 것이다.” 매우 정확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쁘다면 게으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하신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생업은 부업이고 전도가 본업입니다. 전도를 하라고 일터를 주셨기에 이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게으른 종이라는 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심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열심을 품고’는 헬라어로 토 프뉴마티 제온테스인데, 우리 성경에서는 ‘토 프뉴마티’를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토 프뉴마티’는 영인데 이를 성령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영’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저는 전자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주를 열심히 섬기는 일은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심히 없는 것을 성격 탓으로만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주님을 열정적으로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둘 중의 하나를 결여하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믿을 때는 열심이지만 어느 정도 신앙 연륜이 쌓이면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뜨뜻미지근하여 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2:4-5)하시고, 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3:15)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열심히 사랑하지 않으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지런해지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게을리하는 것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부지런해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라고 말하면서 다섯 가지를 주문합니다. 12-13을 읽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첫째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하지만 소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는 중에 즐거워하라는 뜻일까요? 이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소망을 ‘엘피스’라고 하는데 이는 ‘확실한 소망’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확실한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확실한 소망입니다. 따라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는 것은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환난 중에 참으라고 말합니다(12). ‘참다’는 동사가 헬라어 ‘휘포메노’인데 이는 ‘‒밑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상황에서 이를 피하시지 않은 것이 바로 ‘휘포메노’입니다. 왜 환난을 참아야 할까요? 환난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난을 참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할 때 이를 참을 수 있는 비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지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아주 짧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환난도 잠깐만 참으면 됩니다. 이세상에 영원한 것으 하나도 없습니다. 환난도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입밖으로 외치시기 바랍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환난이 사라지고 영광이 다가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셋째로,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합니다(12). 여기서 ‘힘쓰며'(프로스카르테룬테스)는 헬라어로 ‘전심 전력하다’는 뜻으로 주로 기도를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행 1:14;2:42; 골 4:2). 그런데 ‘힘쓰라’는 동사가 원어로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도에 힘쓰는 것을 중단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죽듯이, 기도를 멈추면 영적 생명이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생명이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오는 통로를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흘러들어오도록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합니다(13절 상반절). 성경에서 성도들의 쓸 것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곳이 사도행전 244-45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기서 우리가 좀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나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을 믿으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거나 핍박을 피해서 그들만이 함께 살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이와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생활을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환난이 불어닥치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이 왔을 때 갑작스럽게 적응하려면 힘이 들기 때문에 지금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정교회를 준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한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하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음으로 필요를 채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직접 일을 행하시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것은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13절 하반절). 사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구약시대부터 유대 사회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했습니다. 본문에서 ‘손 대접하라’는 것은 나그네에게 음식이나 옷을 제공하거나 갈 데 없는 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많았고,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서로 돌아보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그들이 생존할 수 없었기에 그런 자들을 영접해서 사랑으로 보살펴주고 도와주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앞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물질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도우라는 것이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것은 교회밖에서 물질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자들을 만나면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심판 날에 주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새가 좌우로 날개를 퍼덕이지 않으면 날 수 없듯이 우리가 수직과 수평으로 사랑의 날개를 펼치지 못하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적 존재입니다. 양쪽으로 날개 펴서 퍼덕이므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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