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강, 로마서 4장 18-25 2021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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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강, 로마서 4장 18-25 2021년 1월 10일2021-01-10T16:56:4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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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4장 9-17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칭의와 할례와의 관계를 언급할 때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최초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고, 최초로 칭의를 받은 후 할례를 받은 사람도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칭의와 할례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누군가에게 배우지를 않았는데 칭의와 할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성경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성경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깨닫지 못한 것이 깨달아집니다. 성경을 읽어도 칭의가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셋째로, 왜 바울이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칭의를 얻는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을 바꾸는 방법은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도록 훈련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19-22을 읽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당시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었기에 그의 몸이 거의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또 그의 아내 사라도 90이 되었기에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이루실 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는 것믿는 것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믿음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물으면 둘로 갈립니다. 그런데 대체로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뿐 아니라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아는 것과 상관없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많은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그러자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가는 자들이 많았습니다(요 6:66).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68-69). 무슨 말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그분을 알려고 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일은 무엇이든지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앎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목이 학생들에게 예배에 참여하라고 열심히 권고했지만 이를 전혀 듣지 않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목이 그 학생을 불러서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것이고, 믿을 수 없기에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목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학생이 한 말을 거꾸로 해 볼 수 있겠나?”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가 말한 것을 거꾸로 했습니다. 예배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말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가 믿은 내용은 그의 몸에서 상속자가 나올 것이고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7장 17절을 읽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사건은 아브라함의 나이 80세 전후에 일어났고, 창세기 17장 사건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일어났습니다. 즉 20년이 되어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렇게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졌다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주석가인 헨드릭슨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심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또 혹자는 아브라함이 의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의심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말했고(17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울이 아브라함이 의심했어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지 않아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듯이,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도 칭의의 믿음을 끝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관련하여 다양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20절의 의심하지 않고라는 겉으로는 능동태이지만, 영어로 ‘waver’로 ‘약해지다’입니다. ‘약해지지 않고’는수동적인 의미입니다. 또 견고하여져서는 ‘견고하다’의 수동태입니다. 21절에 확신하였으니는 원어로 ‘being fully persuaded’되어 있기 때문에 ‘확신되어졌다’로 수동태이고, 또 22절에 의로 여겨졌느니라는 ‘여기다’의 수동태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수동태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견고하게 되고, 확신하게 되고,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칭의의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계속해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도 제자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말씀을 지켰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17:6).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도 주님께서는 버려두시지 않고 결국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과 특권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와주는데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습니까?

     

    셋째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시 21절을 읽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아브라함은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은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신념과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신념의 사전적 의미는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신념이나 믿음이나 같습니다. 또한 믿음과 신념이나 넓게는 긍정적인 사고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하기란 어렵습니다. 노만 필 목사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번영신학과 맞물려서 한 동안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믿음이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된 신념인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을 갖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됩니다. 성경을 읽거나 듣던 중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갖게 된 믿음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을 인용해도 자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면 신념입니다. 즉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서 만들어진 믿음은 신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믿음은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의 비전은 2030123007000입니다. ‘2030년까지 12명의 디렉터와 300명의 현지 목회자와 7000명의 평신도사역자를 파송하겠다’는 것입니다. ‘12’는 예수님의 제자 12명에서 나왔고, ‘300’은 기드온의 300용사에서 나왔고, ‘7000’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우리의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같이 보입니다. 물론 우리의 비전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숫자 12, 300, 7000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2, 300, 7000이라는 숫자가 성경에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직접 12명의 디렉터, 300명의 현지 목회자, 7000명의 평신도사역자를 파송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달 20억의 재정을 구하게 된 것도 7,312명을 계속해서 파송하려면 매달 그 정도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20억을 매달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어떻게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123007000의 비전이 내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를 포기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계속 기도하게 하소서.” 왜 그럴까요? 우리 비전이 저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면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비전이라면 우리의 환경과 생각으로는 안 될 것 같아도 이를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게 된 것과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을 연결합니다. 23-25을 다시 읽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그만이 아니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예표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과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해석한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바울이 성경을 이렇게 해석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구약을 신약과 별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처럼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약성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구약성경만 보고 신약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메시아닉 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반가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주장 중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유대성 회복’을 주장하면서 구약의 절기를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약의 절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습니까? 갈라디아서 48-11을 읽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여기서 ‘날’은 안식일(토요일), 금식일(화요일, 금요일), ‘달’은 매달 지키는 절기, 즉 월삭(매월 첫째 날)을, ‘절기’는 유교절(무교절), 초막절(장막절), 오순절(칠칠절)을, ‘해’는 안식년(매 7년)과 희년(매 49년)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를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메시아닉 쥬도 이런 것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다시 회복하자고 하는 것은 복음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고, 복음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복음 하나만으로 구약의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는데 부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절기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절기의 의미와 뜻을 깨닫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복음을 믿지만 말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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