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8회) 로마서 3장 9-18절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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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8회) 로마서 3장 9-18절 2020.12.132020-12-13T09:59: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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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로마서 3장 1-8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유대인이 할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신뢰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신뢰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어디 있습니까?

    둘째로,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의를 저버렸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시편을 인용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지 성경에 근거하려면 무엇보다 평소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매일 큐티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불의를 행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마치 무엇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도 정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방인들의 타락상과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9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 역시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로 번역된 ‘판타스’(παντας)는 단지 전체를 뜻하지 않고 각각 한 사람 한 사람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즉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죄 아래’에서 ‘아래’에 해당되는 전치사 ‘휘포’(ὑπό)는 어떤 세력이나 통치, 지배권, 명령 등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선언하다’가 헬라어로 ‘프로에티아사메다’(προητιασαμεθα)인데 이는 ‘~앞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프로(πpo)’와 법적 용어로서 ‘죄목’(행 28:18)이란 뜻을 가진 ‘아이티아(αἰτία)’의 파생어와의 합성어로서 ‘앞서 죄목을 정하다’, ‘먼저 선고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마치 법정에서 내린 선고와 같이 엄정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는 이방인들도 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선민이라고 자부심이 가득한 유대인들도 더 나아가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도 예외 없이 다 죄인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은 이렇게 비신자든 신자든 다 같다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쉬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돈이 많다고, 많이 배웠다고, 재주가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외모가 아름답다고 우월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남보다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재능이 없다고, 지위가 낮다고 열등감을 갖고 하찮은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비교하므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최고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기에 끊임없이 비교하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공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보시오. 사공, 철학을 아시오.”, “나는 철학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빈정대듯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에 열받은 사공이 바다 한 가운데 이르자 배의 무게 중심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여 뒤집어지므로 둘 다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이때 사공이 여유를 부리며 이렇게 묻습니다. “수영할 줄 모르시나요?” 소크라테스는 한 번도 수영을 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개도 수영을 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수영할 줄 모릅니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큽니다.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죄인이든 구원받은 죄인이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랑거리를 던져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배설물로 생각하고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안 버리면 계속하여 썩은 냄새만 풍길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0-12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러분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어떻게 의인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시편 141-3을 인용한 것임을 알면 이런 의문은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1-3). 시편 기자는 누가 볼 때 의인이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어떤 사람은 선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다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보십니다. 개미 세계에서는 여왕개미와 일개미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똑같습니다. 한 처녀가 할머니와 함께 택시를 합승했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연신 방귀를 뀌자 처녀는 얼굴을 창가로 돌리며 속으로 할머니를 흉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처녀도 배가 아프더니 방귀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참았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방귀를 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속으로 할머니를 흉보았는데 소리를 내서 뀔 수 없어서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문지를 때마다 나는 소리에 맞춰서 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방귀를 뀌고 나니 배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창가로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소리는 그렇다 치고 냄새는 어떻게 할거야!” 방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는 다 같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점심시간이 되자 민규가 도시락을 꺼냅니다. 혜지가 이를 보고서 “민규야, 무슨 반찬 싸왔니?” 그러자 “다꽝.” 그러자 혜지는 “난 덴뿌라 싸왔는데!” 선생님이 이를 듣더니 큰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 선생님이 일본어 쓰지 말라고 했지! 둘 다 뒤로 가서 바께스 들고 서 있어!”

     

    바울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말로 짓는 죄를 언급합니다. 13-14을 다시 읽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먼저 바울은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죽음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덤을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 회를 칠하여 무덤을 분별하게 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무덤은 오래되어 관리가 허술하면 입구를 막은 돌이 굴러내려 악취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즉 ‘저희 목구멍을 열린 무덤이요’라고 한 것은 시체에서 악취를 품어내듯이 우리가 입만 열면 악하고 독한 말을 해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혀는 속임을 베풀며라고 말합니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을 해서 했듯이 상대방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독사가 독을 품어내서 죽이듯이 독한 말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한 연구자가 화난 부부가 말로 싸울 때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분석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코브라의 맹독보다 더 강력한 독이 나왔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라고 말합니다. 입만 열면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비난을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은 모두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몸의 안쪽에 있는 것에서부터 바깥쪽에 있는 것 순으로 언급한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은 근원적으로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12:3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도 거짓을 말하고 악독과 저주를 쏟아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통치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언어의 문제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한 것이고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내뱉은 말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12:36). 따라서 우리이 마음을 정화하여 선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입으로만 죄를 범하지 않고 행동으로도 범한다고 말합니다. 15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발이 피를 흘리는데 빠르다는 것은 이곳저곳 다니며죄를 많이 범한다는 것입니다. 걸음의 속도와 죄를 범하는 건수는 비례합니다. 걸음이 빠를수록 죄를 더 많이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16-17을 읽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한마디로 인생이 파멸과 고생으로 점철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복은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최고의 복은 평강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기에 이미 평강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14:2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을 갖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강을 누리고 있지 않다면 주님과의 관계에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은혜의 통로가 차단되어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높은 도덕과 윤리를 요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은 큰 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며칠 전, 한국을 대표할 뿐 아니라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김기덕 감독이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국내에서 활동을 중단하고 외국에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여배우들에게 폭언과 성폭행을 하므로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감독들이 이보다 더 악한 짓을 해도 멀쩡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보다 처벌이 강화되어도 안타까운 사실은 갈수록 더 악해지고 죄를 더 많이 짓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유황불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요? 18을 다시 읽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도리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살인자가 심판자에게 대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죄를 범하면서도 목을 곧게 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우리는 이미 은혜의 맛을 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계속해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는 순간 지옥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든지, 두려워하므로 죄에서 떠남으로 주께서 예비해두신 은혜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죄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죄에서 떠남으로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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