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6) 로마서 2장 17-29절 2020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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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6) 로마서 2장 17-29절 2020년 11월 29일2020-11-29T09:27: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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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로마서 2장 1-16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은 마귀의 유혹을 받고 교만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인데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족보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었는데 왜 여전히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냐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교만 때문입니다. 비신자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덜 짓기 때문에 그들보다 의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있다면 교만한 상태에 있음을 알고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정죄하다, 선고하다’는 뜻을 가진 법정용어입니다. 즉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판한 것보다 더 무섭게 심판하시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즉시 심판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것은 1000년을 기다려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동일한 잣대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대하면 됩니다.

    다섯째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망만 가지지 말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을 명심하고 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강해 6번째 시간입니다. 본문은 율법을 알고 있지만 율법대로 살지 않는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삶을 날가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17)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유태인·유다인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다소 다릅니다. 유대는 라틴어 유다이아(Judaea)에서 왔는데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유태(猶太)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유태인은 대등소이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유태인)과 유다인은 다릅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뜻합니다. 반면에 유다인은 통일왕국 이스라엘이 북(北)이스라엘과 남(南)유다로 나누어졌는데, 남(南)유다 백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뜻하는 유대인과 남(南)유다 백성을 뜻하는 유다인은 구분해야 한다(삼하 2:4, 대하 13:15; 20:4).

    그러면 유대인의 기원은 언제로 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광의의 의미로서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하나인 유다 지파에서 유대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은 고대 셈족의 한 갈래로 히브리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후손으로(창 10:1, 21-32; 대상 1:17-28, 34; 2:1,2)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 이어지는데,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고(창세 32:27-29), 이스라엘(야곱)의 12아들이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는데 그중에서 유다 지파에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왕하 16:6). 둘째는, 협의의 의미로서 바벨론에서 귀환한 자들이 대부분 유다 지파였기 때문에 이를 유대인의 기원으로 봅니다. 다윗은 B.C. 1000년경,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통합하여 통일왕국을 이루고, 솔로몬이 왕위를 잇지만, 그가 죽은 후 통일왕국은 북이스라엘(사마리아)과 유다왕국(예루살렘)으로 분열됩니다(B.C. 931년). 그 후 북이스라엘 왕국(10지파)은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고(B.C. 722년), 유다왕국(유다와 베냐민 지파)은 바벨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습니다(B.C. 586년). 그런데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고국으로 귀환했는데, 이때 유다 지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으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의 기원을 후자, 즉 협의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와 유대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믿는 종교가 유대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유대교는 크게 네 가지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믿은 사두개파, 율법의 준수를 강하게 주장한 바리새파, 세속을 이탈하여 사회와 구별된 공동체 생활을 한 에세네파, 로마 정부에 폭력으로 항거한 열심당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인 헤롯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유대인은 유대교 분파 중 당시의 정통파로서 백성에게 존경받았던 바리새파를 뜻합니다. 바울은 당시 바리새파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17-20입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한마디로 그들은 먼저 율법을 받은 것으로 인한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다시 21-22을 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기만 했지 자신들은 율법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3가지로 예를 듭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도둑질을 할 수 있느냐,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간음할 수 있느냐, 그들이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먼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이를 가르쳤지, 실제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즉 입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행동으로는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최고 윤리 경전이라고 불리는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구약만 갖고 있지만 우리는 신약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 성경의 말씀대로 전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경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감사는커녕 먼저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영국의 아이들은 담배를 일찍 피우기로 유명합니다. 어떤 아이는 7-8세에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데, 종종 부모가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반문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피우시는데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나도 피우면 안 되나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유명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 어머니가 찾아와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단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입니다. 그러니 단것을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아이가 선생님을 너무 존경하니까 선생님이 한 마디만 해주시면 들을 겁니다.” 그러자 랍비는 일주일 후에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약속한 날에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음 주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다음 주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다시 아이를 데리고 랍비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아이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것을 먹으면 몸에 해롭고 이가 썩으니 절대로 단것을 먹으면 안 된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간단히 말씀하실 것을 왜 3주씩이나 시간을 끌었습니까?”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단것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단것을 먹으면서 어떻게 아이에게만 단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3주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단 것을 끊었기에 이제야 아이에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세와 능력이 있었던 것은 가르치신 대로 사셨고 사시는 대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대로 먼저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이 같도록 힘써야 합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으므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23-24을 읽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들이 율법을 먼저 받은 것을 자랑하지만 율법대로 살지 않는 것은 율법을 범한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고,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결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욕 먹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있습니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에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한동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향하여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으려고 하고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단지 예배당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를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일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란시스는 자기 제자들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가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자들이여! 오늘 우리가 저 마을로 내려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그런데 마을로 내려온 프란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을을 돌기만 하다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이를 이상히 여긴 제자들이 프란시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조금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마을로 가자고 하셨는데, 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프란시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가 아랫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다 지켜보았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할례와 율법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25-27절을 읽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할례를 받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고 정죄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할례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베어버리는 것입니다. 할례는 바벨론과 앗시리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셈족 사람들과 이집트인들 가운데서 행하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지만 할례받지 않은 자들을 무시하고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지침서입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하지만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진정한 할례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28-29을 읽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무슨 말입니까?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육신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영적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참된 유대인은 육신의 할례를 행한 자가 아니라 마음을 찢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주일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할례를 마음에 하라고 하면서 표면적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삶의 예배도 드려야 하지만 주일에 드리는 이 예배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세상에 나가서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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