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3) 로마서 1장 16-17절 20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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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3) 로마서 1장 16-17절 2020.11.8.2020-11-08T10:00: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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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로마서 1장 8-15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피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로마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것을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관심은 비례합니다. 우리의 기도내용을 보면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갈 좋은 길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죄수의 신분으로 간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가지 않았다면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고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알린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눅 22:32, 롬 8:26-27). 왜 그래야 할까요? 상대방이 그 말을 듣고 힘과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원장님은 날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바울이 은사를 나눠준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이냐는 것입니다. 은사를 나눠준다는 것은, 마치 물건을 나눠주듯이 일방적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하므로 함께 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교제는 한쪽은 손해 보고 다른 한쪽은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교제해야 함께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매일 보낸 큐티에 반응하는 것도 말씀의 교제로 함께 강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바울이 로마뿐 아니라 전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항상 빚진 자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옵헤일레테스)는 원어로 이미 법정에서 갚을 것이 있는 죄인으로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빚진 자는 채무 상환을 이행하지 않으면 응분의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이므로 이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복음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읽은 두 절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단어인 복음, 구원, 믿음, 의인 등이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의 기초를 쌓으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본 구절이 중요한 것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파견한 신부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속죄권을 사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루터는 이 말씀을 붙잡고 종교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전,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16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즉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기병대는 모든 세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강하게 보였지만 철학자 세네카가 로마시를 ‘악의 소굴’이라고 할 정도로 속은 완전히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악의 도시의 대명사인데 고린도나 에베소와 같은 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이 어떤 자들에게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믿는 모든 자입니다.

    ‘모든 자’는 말 그대로 모든 자입니다. 성별과 남녀노소와 국적과 피부 색깔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자’를 크게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합니다. 그가 왜 모든 자를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하여 말했을까요? 유대인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은 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요즘도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자기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들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자들이 바로 신천지이고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144,000에 들어가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종교에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미 요엘 선지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행 2:17)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모든 자를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하면서 유대인 앞에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를 ‘나중’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우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번역본은 ‘first’로 번역하고 있고, 표준새번역은 유대인을 비롯하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에 유대인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음에 있어서 유대인이 먼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께서 유대인이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어도 가는 곳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이 다 구원받지 않으면 절대 예수께서 재림하실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 전도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동안 대체신학이 교회에 편만했습니다. 대체신학은 신약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 역할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출발하여 칼빈을 거쳐 정착되었습니다. 칼빈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은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에 불과했고, 세계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경 주석가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고, 그 역할을 교회가 대체하였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3 성전의 건축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대체신학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고서는 주님의 재림이 불가하므로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가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했을 때 성령께서 이카림 원장님에게 이들은 나를 거짓 메시아인 줄 알고 있으니 너희가 이들에게 내가 진짜 메시아인 것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제자 삼고 그들과 함께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4회나 유대인 목회자를 훈련하였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해외 사역이 거의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단지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유대인 복음화를 위한 더처치를 설립하고 D3센터를 마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교회 재정이 마이너스라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6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셨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추진하면 주님께서 새일을 행하신다는 믿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6년 전, 이곳에 와서 몇 개월간 재정 문제로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국민일보에 5단 광고를 내고 안성 사랑의 수양관에서 무료로 제자훈련세미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행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법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정의’(justice)라고 주장합니다(이들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판결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도덕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의로움’(righteousness)이라고 주장합니다(이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는, 언약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faithfulness)이라고 주장합니다(이들은 인간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해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시도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해석하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가 이렇게 해석하고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다가 저와 똑같이 번역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번역’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를 맺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의롭게 살아갈지라도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가 나타났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by faith from first to last’ 여기에 전치사가 두 개 등장합니다. from은 출처를 말하고, to는 방향을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인이 되는 것도 믿음이고 의인이 된 후에도 믿음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가 한 말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출발점은 믿음이고, 의인이 된 자가 향해야 할 목적지도 믿음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은 기독교이지만 우리와 구원론이 전혀 다릅니다. 의인이 되는 출발점이 오직 믿음이 아니라 선행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을 보는 종교입니다. 믿음 외에 선행을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루터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끝으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까?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자력 구원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타력 구원설’이라고 합니다. 즉 타력 구원은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행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습니까? 우리는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와 지식을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아는 ‘지식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를 추구하는 마음에 믿음은 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이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100%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인간의 요소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적 요소는 자신을 향하게 하고,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께 집중하여 그분께서 공급하는 힘으로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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