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41차 14장 13-23절 2021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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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41차 14장 13-23절 2021년 8월 15일2021-08-15T15:29: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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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41-12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갈등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모두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다툼에는 주님께서 어느 편도 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간에 갈등과 다툼이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가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크게 4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방이 자신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우리 모두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기 때문이고, 넷째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를 몰라도 상대방을 업신여기나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모든 허물이 보여도 덮어주려고 하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을 읽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바울은 앞서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믿음이 약한 자는 믿음이 없는 자를 비판하지 말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믿음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업신여기는 것도 비판의 일종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부딪힐 것은 원어로(프로서 콤마) 사람으로 하여금 발이 부딪혀서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칠 것은 원어로(스칸달론)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마련된 장애물을 뜻합니다. 따라서 형제 앞에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은 실수든 고의든 상대방이 시험에 들만한 것은 사전에 없애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이타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린아이를 키운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가 놀다가 다칠 위험이 있는 물건을 다 치우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습니다. 즉 어른 중심의 집안 환경을 없애고 아이 중심의 환경을 만듭니다. 이렇게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는 성육신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므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자신이 중심이 서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 무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음식과 관련하여 믿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로, 상대방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믿음을 사랑으로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14-15을 읽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4절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를 살피던 중 표준 새번역의 번역이 다르게 번역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즉 표준 새번역은 속되다는 것을 부정하다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문맥상 가장 잘 번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어떤 음식은 부정하고 어떤 음식은 부정하지 않다고 구분했습니까? 율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교회 구성원은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상당히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여전히 우리가 율법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판단의 기준을 율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는데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판단이 곧 주님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음식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자가 어떤 자라고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사소한 음식 문제로 다투는 자가 주님께서 대신하여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문제로 형제와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형제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소한 문제로 형제와 다투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기쁘게 할 수도 있어도 몰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믿음의 자유를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16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여기서 ‘선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도 ‘속된 것’처럼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현대인의 번역이 가장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즉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한 것이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음식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신약성경에서 음식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7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7:14-16). 그러자 무리들이 떠난 후 제자들이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7:18-19). 이렇게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므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자유가 있더라도 비방을 받는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17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처럼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행사되는 곳입니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고, 사람 관계에 화평이 있고, 신령한 기쁨이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음식 문제로 비난을 받으므로 형제 자매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기쁨을 잃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갈 때 어떤 결과가 있다고 말씀합니까? 18절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이타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감동시키고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믿음의 자유를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19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앞서 바울은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자유를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화평을 구하면 덕을 세우는 것이고, 덕을 세우면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옳은 것만 주장하면 화평과 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옳은 것만 주장하셨다면 우리와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화평과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실수가 있더라도 약점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유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고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21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5대 욕심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욕, 재물욕, 명예욕입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식욕입니다. 이것을 억제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장기 금식을 여러 번 하고, 월삭, 3일, 5일 7일 등 수없이 많이 금식을 했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원장님 시술을 앞두고 3일 금식을 한 것이 최근 들어 처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은 식욕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이 문제로 시험에 든다고 아예 고기도 포도주도 먹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대방을 배려하여 음식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넷째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갖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22을 읽습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은 비록 연약한 자를 위해서는 자기의 자유를 제한할지라도 자기의 믿음에는 위축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믿음의 자유를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믿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이중적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나 일정해야 하지만, 사람을 향해서는 프렉서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의 편견과 고정 관념은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한번 마음에 안들면 끝까지 원수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과의 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합니다.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하면 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역지사지’하면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관계가 개선됩니다.

    다섯째로, 믿음이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23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이 약한 자가 확신이 없으면서 강한 자가 먹는다고 따라 행동한다면 이는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고 곧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는데 마치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 모두 죄일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기초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과 같으니라”(1;17)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정확히 모르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믿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대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있지 않다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상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평신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제자 삼아야 한다고 말하면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단지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개인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고 십일조를 잘 드리고 목회자의 말을 잘 들으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가서 제자 삼지 않으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즉 믿음의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이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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