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40차 로마서 14장 1-12 2021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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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40차 로마서 14장 1-12 2021년 8월 8일2021-08-08T19:01:3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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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311-14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어떤 시간관을 갖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시간관은 크게 직선적 시간관과 순환적 시간관으로 구분하는데, 바울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사건 중심적 시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그리스도 재림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재림을 중심으로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구원이 더 가까웠다고 말한 것입니다.

    둘째로,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이냐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았기에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구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툼과 시기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헐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왜 바울은 옷에 비유하여 종말론적 구원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옷은 입는 자나 입은 것을 보는 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은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또 입은 옷을 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로 작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알게 되어 주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탄생 된 이래 계속해서 내부적으로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도 내부적인 분쟁이 다반사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에서는 바울파와 게바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반목하므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교회에서도 특별히 음식과 절기 문제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죄라고 믿었고, 또 어떤 사람은 상관이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어떤 신자는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본인들이 각자 그러한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터인데, 자신의 주장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생각하여 서로 비판했기 때문에 로마교회 안에 분열이 싹텄던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성도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 약한 자와 다른 하나는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자를 뜻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다른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에 매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자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면 어느 편을 들 것 같습니까? 혹자는 믿음이 약한 자의 편을 드는 분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믿음이 강한 자의 편을 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 그룹을 모두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다툼에는 주님께서 어느 편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욥과 그의 세 친구와 엘리후와의 논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고 세 친구와 엘리후를 책망하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 책망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왜 서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두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1-3절 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우선 본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성도들 가운데는 육식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동일한 음식을 갖고서 정반대의 주장을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고기가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도시에는 우상의 제단에 바쳤던 고기를 장사꾼에게 불하하면, 장사꾼은 이를 다른 고기와 섞어서 거리에 파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육식을 하는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먹을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 중에는 이에 대해 크게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소위 믿음이 강한 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는다는 말씀을 근거로 먹어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마 15:16-18).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큰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84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러나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은 고기 먹는 것을 신앙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겼고, 또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답하였습니까? 다시 3절을 읽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녀입니다. 따라서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과거에는 아내의 믿음이 없다고 핀잔을 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네 아내도 내가 사랑하는 자다. 왜 내 자녀를 네가 함부로 업신여기느냐.” 형과 동생이 종종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간에 왜 싸울까요?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상대방이 지금 큰 죄를 범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입니다.

    두 번째로, 상대방이 남의 하인이기 때문입니다. 4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우리가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자를 ‘남의 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하인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종의 운명은 오직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에 대한 심판은 주인에게만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약한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권한 밖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도전하는 것으로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모두가 주를 위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5-9을 다시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5절과 6절에서 말하는 ‘날’은 유대인들의 성일로 지키던 월삭이나 각종 절기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각종 절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대로 지켜오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이미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를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제는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에 여전히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파와 교회에 따라 절기 문제로 다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탄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생일도 축하하는데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성탄절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지 않을뿐더러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우리가 읽은 5-9절에 답이 있습니다. 여기에 반복해서 5섯 번이나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이날을 저 날보다 중히 여기든지 여기지 않든지, 금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등의 문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주를 위해서라면’ 고기를 먹든 안 먹든, 절기를 지키든 안 지키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전에 동기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이것저것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자신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때 ‘주를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의를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가정이나 교회에서 겪는 갈등이 훨씬 많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부산 더처치에 간다고 합시다. 부산에 가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제가 매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걷습니다. 한 시간 걸으면 약 5km, 한 시간 반이면 7.5km를 걷습니다. 만일 하루에 8시간 걷는다면 약 40km를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산이 약 450km이니까 걸어가면 11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또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습니다. 한 시간에 40km를 타면 잘 타는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좀 천천히 약 30km로 하루 8시간 타면 240km를 갈 수 있으니까 늦어도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로 가면 4-5시간 이면 되고, KTX를 타면 2시간 40분이면 되고, 비행기를 타면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동차나 KTX나 비행기를 제쳐두고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부산에 간다고 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제게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간다면 이를 비판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할 경우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갖고 하지 말고 먼저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다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10-12을 읽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믿음이 강한 자든지 믿음이 약한 자든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형제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대에 왜 섭니까? 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라고 합니다. 베마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관이 서 있는 장소, 즉 심판대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심판관이 그 자리에서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자격을 박탈하고 정정당당히 승리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심판대에서 우리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고 우리 모두는 경주자들입니다. 우리는 심판날에 심판을 받을 대상이지 심판주가 아닙니다. 따라서 심판자처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갑자기 궁금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왜 오늘 본문에는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선다고 말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5장 24절과 로마서 14장 10-1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는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는 지옥에 던져지지 않게 된다는 것으로 구원과 관련된 심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 10-12절에 나오는 심판은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심판은 받지 않고 오직 천국의 상을 위해서만 심판을 받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왜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가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상대방이 우리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 모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모두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네 가지를 몰라도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모든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물이 보이면 오히려 덮어주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므로 하나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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