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34차 로마서 12장 3-8절 2021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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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34차 로마서 12장 3-8절 2021년 6월 27일2021-06-27T16:52:1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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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21-2을 통해서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전통적인 구원론,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구원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복음만 믿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구원받기 전 필수 조건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구원론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삶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배와 삶을 분리하지 말고 예배가 삶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하고, 이를 영적 예배라고 한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본은 ‘영적’이라는 단어를 ‘합당한’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삶 전체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기 전,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안에서부터 변화가 되지 않으면 행동의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회개할 때 자신 안에 ‘정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한 것은 마음이 깨끗해야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섯째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것은 능동태로, ‘변화를 받아는 수동태로 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변화시켜주셔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 변화를 원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먼저 3을 다시 읽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해서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과대 평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운동화를 신는 것과 10cm 하이힐을 신는 것과 흡사합니다. 꾸미고 포장한 만큼 편할 수 없습니다. 프로이드는 ‘슈퍼 에고’와 ‘트루 에고’ 사이의 갭이 크면 클수록 인간은 불안하고 고민이 많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는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의 분량’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의존도에 따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의 글을 들으면 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크시다면 내 믿음도 큰 것이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으시다면 내 믿음도 작은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존귀히 여기면 나도 그만큼 존귀해질 것이고, 내가 그분을 귀히 여기는 만큼 나의 가치도 결정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존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이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4,5을 읽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각 지체의 역할과 각 지체와 몸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이를 성도 각 사람의 역할과 각 성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빗대어 말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지체의 기능이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절대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각 지체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눈은 눈만의 역할이 있고, 귀는 귀만의 역할이 있고, 코는 코만의 역할이 있고, 입은 입만의 역할이 있듯이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각각 역할을 하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코가 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입이 코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듯이,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눈의 역할, 코의 역할, 귀의 역할, 입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그래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 몸에서 각 지체를 서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는 동종에서만 가능합니다. 모든 지체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각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서 종종 상처를 받고 시험을 당합니까?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사랑을 덜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강아지는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아지는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샘이 났습니다. 자기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만 마당에 홀로 앉아서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고,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당나귀는 바로 이때라 생각하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주인에게 달려가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의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나귀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기는커녕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므로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를 지나치게 인식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하듯이 지나치게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안에서 각종 문제가 발생합니까? 자신을 지나치게 인식하여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개척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양하게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 몸에서 어느 한 세포가 커진 것입니다. 암은 온몸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암이 죽음으로 몰아가듯이 지나치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면 교회를 망가지게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십니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를 교회를 망가뜨리는데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둘째로, 자신을 상대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는 각각 독자적인 기능이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서로 합력해야 제 기능을 발할 수 있습니다. 연결되지 않는 지체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눈만 있고 다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손과 다리는 있는데 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손과 발과 눈이 있는데 입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21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합니다. 함께 찾아서 읽겠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바울이 이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각 지체의 기능이 있지만 서로 연합해야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듯이,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의 역할이 있지만 서로 연합해야 교회가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상대방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독특한 존재이듯이 다른 사람도 독특한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체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이지, 교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께 사역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지체의식을 가지라고 말씀하는데 교회는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AD 1세기에 뿔뿔히 흩어졌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서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그 후 속사도 시대와 교부 시대를 거쳐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가 되면서 교회의 역동성은 사라집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약 천 년이상 영적으로 암흑기를 맞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그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와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론’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종교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선한 행실이 있어야 구원을 받고,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신부를 통해서만 나갈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키면서 크게 실수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신도는 말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신도가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몸의 각 지체가 활동해야 건강하게 되듯이, 목회자와 성도들이 다같이 사역을 해야 건강한데 목회자만 말씀을 가르치고 평신도는 사역을 하지 않으니까 지체 의식이 약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하지만,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므로 지체 의식이 없다는 것은 교회로서 이미 존재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띠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지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 섬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종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을 성숙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교회는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은 6-8절에서 우리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언급합니다. 먼저 6절을 읽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바울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다르듯이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 라고 하는데 ‘선물, 재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각 은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다고 하시는 데 자신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은사가 없다고 투덜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은사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은사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6-8을 읽습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바울은 6-8절에서 7가지 은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7가지 은사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를 든 것에 불과합니다.

    첫째로,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신학자들은 예언을 전자로만 생각하지만, 저는 본문의 예언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라면, 굳이 뒤에 가르치는 것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주신 것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해야 합니다. 섬김이란 원어는 ‘디아코니아’인데 여기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는 섬기는 자는 봉사의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해야 합니다. 교사를 헬라어로 ‘디다스 칼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옳은 것을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옳지 않은 것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로의 말만 하고 다른 말을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위로한답시고 욥의 친구처럼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구제는 남에게 공짜로 주는 것이므로 자칫 자기 기분에 따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성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스리는 자라는 목사와 장로를 말하는데 이들이 부지런히 다스리라는 것은 근면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잠 27:23). 일곱째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긍휼을 베풀 때는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개한 7가지 은사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에게 뭔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주는 위치에 있을 경우 어떤 생각을 하기 쉽습니까?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7가지 은사를 사용할 때는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한동안 축사 사역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받은 것은 40일간 하루 17시간씩 기도한 후였습니다. 그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남들이 하지 못하는 특별 기도를 했기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특별히 그런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속에 교만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영적으로 교만해지자 제 인생은 곤두박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로 인하여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이므로 서로 소중히 여기고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많은 일을 하고, 헌금을 많이 드려도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이미 교회생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지체를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각자 받은 은사를 겸손히 사용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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