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33차 로마서 12장 1-2절 2021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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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33차 로마서 12장 1-2절 2021년 6월 20일2021-06-20T15:00:4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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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133-36을 통해서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평소 고민하던 자기 민족의 구원 문제를 성경을 통하여 해결받고서 깊도다라고 감격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성경으로 해결받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 모든 문제의 답이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성경으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만일 성경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예를 들어, 오염된 지구를 버리고 2행성으로 각광받는 화성으로 이주를 계획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마 24:29).

    둘째로, 바울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지만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셨듯이, 지금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결국 그들도 구원받게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더처치를 이렇게 사용하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셋째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헌금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이를 갚아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적게 드린다고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많이 드린다고 과시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듯이 헌금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의 하나는 먼저 교리를 다루고, 나중에 실천 방법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로마서도 1장부터 11장까지는 구원론에 대하여 다루고 있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원인과 결과 접속사이므로 원인에 해당하는 앞 내용과 결과에 해당하는 뒷내용을 연결해 줍니다. 그러면 ‘그러므로’가 연결하는 이전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앞인 11장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1-11장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후자로 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이 교리를 먼저 말하고 후에 실천 방법을 말하는데, 1-11장에서 구원론을 다루고, 12장에서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먼저 구원론을 다루고 뒤이어 구원받은 자의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을 단지 장차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단지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면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데, 왜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믿는다고 목숨의 위협을 받거나 육체적인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황제를 신격화했고,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으면 로마제국과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내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집의 주인이 바뀌어도 완전히 집이 바뀌는데 어떻게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들의 삶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자유 신교령을 선포하고, 381년에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개를 거치지 않고 옛날에 믿던 풍습과 종교를 그대로 갖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대충 믿는다고 말하면 세례를 주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지 않고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회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말씀으로 훈련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을 해결하려고 전통적인 구원론에 메스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유보적 칭의론’과 ‘주재권 구원론’입니다. 유보적 칭의론은 전통적으로 복음을 믿는 즉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속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주재권 구원론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통적인 구원론에 메스를 가한다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 구원론이든지, 유보적 칭의론이든지, 주재권 구원론이든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강입니다. 회개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그 어떤 구원론을 주장한다 해도 삶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시 본문 1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시기는 대략 A.D. 57-58년 경이므로 아직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린 양을 번제로 드렸고, 안식일에는 두배로 드렸는데 이를 상번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마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에 따라 성전에서 동물을 죽여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몸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까?

    하나는,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비롯하여 레위기와 민수기를 보면 제물과 관련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는 여호와 앞에 거룩한 것이라입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로서 ‘자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구분되다’는 뜻이 나왔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속에 있지만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말씀에 비추어볼 때 그릇된 것이라면 절대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산 제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제단에 놓고 불태워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와 전혀 다르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짐승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몸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칼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불로 태우듯이,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관련한 코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하나님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됨됨이를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중 갑자기 배가 고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재빨리 나가서 잉어와 새를 물어왔고, 원숭이도토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아무것도 물어오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토끼에게 물으셨습니다. “모두들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왔는데 왜 너는 빈손이냐?” 그러자 토끼는 즉시 모닥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자 갑자기 불 속으로 뛰어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내 고기가 익거든 잡수세요.” 토끼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라고 달에다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초대 교부 중에 ‘golden mouth’라고 불리던 크리소스톰은 거룩한 산 제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몸이 어떻게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눈으로 일체 악한 것을 보지 않게 하라. 그러면 눈이 제물이 될 것이다. 혀로 일체 불결한 것을 말하지 않게 하라. 그러면 혀가 제물이 될 것이다. 손으로 일체 불법한 행위를 하지 않게 하라. 그러면 손은 온전히 드리는 번제가 될 것이다.”

    바울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하고, 그렇게 드리는 예배를 어떤 예배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로기켄인데 이는 ‘논리적인’, ‘합리적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은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한 예배라고 할까요? 우리는 구원받기 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습니다(롬 1:25). 모든 지체가 죄를 짓는데 빨랐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3:13-15). 그래서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몸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삶의 예배이기 때문에 이렇게 건물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불필요성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것도 예배당의 불필요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우찌무리 간조’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자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예배당 예배를 부정하는 것은 교회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모임을 가지려면 일정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모임이 보호받으려면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를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 하듯이 삶의 예배를 담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당 예배입니다. 우리가 삶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과 관련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당 예배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 시간에 예배당 안에서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을 예배의 전부로 생각하지 말고,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122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받다(시스케마티조)는 헬라어의 의미는 틀에 맞춰지다입니다. 이는 주물을 부으면 일정한 모양의 물건이 계속 만들어지듯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과 똑같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NIV 영어 성경에는 한글 성경에는 없는 더 이상이라는 말이 첨언이 되어있습니다. 즉 예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의 것이 모두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천국을 향하지만, 그들은 마귀의 자녀이므로 지옥을 향하는 자들입니다. 나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그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변화를 받으라’는 표현은 모두 4번 등장하는데, 모두 예수님께서 변화되신 모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변화를 받으려면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7:21-23). 왜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까?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부패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외모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보다는 속 사람이 새로워지도록 애써야 합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회개하면서 고백한 내용이 시편 51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여기서 다윗이 말한 ‘정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께끗한 마음’입니다. 즉 ‘크린 하트’입니다. 그가 왜 회개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심령이 깨끗하게 변화되지 않으면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것은 온전히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변화를 받아에서 동사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새롭게 하는 것은 능동태이고, ‘변화를 받는 것은 수동태입니다. 즉 ‘변화하라’고 말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해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변화의 주체이십니까?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변화를 받으려면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힘쓸뿐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습니다.(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말한 후, 이것을 말했을까요?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없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데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종에게 주인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인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종은 반드시 마지막 날 주인 앞에서 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자는 상을 받을 것이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 자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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