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9차 로마서 11장 1-12절 202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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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9차 로마서 11장 1-12절 2021.5.232021-07-20T08:40:3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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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0장 14-21절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로, 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점점 믿는 자들이 들어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듣고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책임이기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데,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인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즉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불순종하자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꿈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혜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그들만의 완악함이 아니라 곧 우리의 완악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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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10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논한 후, 11장에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언급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관계를 끝내시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이를 입증합니다.

    첫째로, 자기의 경우를 통하여 제시합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고,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그가 왜 이런 사실을 말할까요? 당시 정통파 유대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열성적이었는데 그도 정통파 유대인이기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수백 킬로나 되었지만,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서 갈 정도였습니다. 바울보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핍박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돌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회심하게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처럼 자기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주장한 것을 통해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좇아다니며 갖은 핍박했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보면 그들은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대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 조계사 앞에서 봉축법요식이 진행되는 중에 1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를 외치며 찬송가를 부른 일이 발생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께서 과연 그것을 원하셨을까요? 그리고 바울이라면 그렇게 전도했을까요? 타종교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핍박해도 하나님께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2-5을 읽습니다.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가 아합 왕 때에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일대 격전을 벌여서 크게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바알 숭배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자 도망을 쳐서 하나님께 그들이 주의 모든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만 남았는데 자신마저 죽이려고 한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 좀 알아야 합니다. 당시는 바알 종교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는 바알신이 땅에 비를 오게 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바알 신은 남자 신이고, 그 아내의 이름은 아스다롯인데, 둘이 성관계를 가질 때에 떨어지는 분비물을 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남녀 창기들이 성관계를 갖게 하면 바알과 아스다롯을 자극하여 그들도 성 관계를 가지므로 비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비를 오게도 하시고 오지 않게도 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당시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 종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기 때문에 여호와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을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야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를 남겨두셨듯이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은 자 사상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창 6:1-8), 롯의 때에도(창 19:29). 이사야 때에도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사 6:13). 특별히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그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이 외에도 구원은 선택된 남은 자들의 것이라는 사상이 구약 여러 구절에서 발견됩니다(사 1:9; 렘 23:3, 욜 2:32; 암 5:15; 미 2:12; 습 3:13).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 두신 자가 있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우리가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바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127:1-2)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둘째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의 눈에는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자가 자기 혼자 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암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칠천 명이나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난 현상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1966년에서 1976년까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문화혁명이 일어났을 때 신학교와 교회를 모두 폐쇄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기독교는 씨가 마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지난 지 45년이 된 지금 1억 명이 훨씬 넘고 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은이 기독교 말살정책을 쓰고 있지만 가정교회를 통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만 보고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도 남겨 둔 자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셋째로,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알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을 칠천 명이나 남겨두셨습니다. 칠천 명은 단지 문자적으로 칠천 명을 뜻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말고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정말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자신이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선 줄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하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2:7-10). 그렇습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드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몸이 망가질 정도로 봉사를 많이 해도 항상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7천 명이 남겨진 것, 즉 남은 자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6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남은 자'(remnant)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자신들의 행위로써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를 말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남은 자 사상을 오해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갈라디아서 31-5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갈라디아서 31-2만 읽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믿음이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주장에 흔들릴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율법의 행위를 내세우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뭔가 주님께 한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단지 주일을 지켰다는 행위만 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이스라엘 중 선택받는 남은 자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이제 완악해진 이스라엘의 다수에 대해 언급합니다. 다시 7을 읽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이스라엘이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은 자’는 앞서 5절에 나온 ‘남은 자’와는 전혀 다릅니다. 5절의 남은 자는 선택받아 구원받은 자를 뜻하고, 7절에서는 정반대로 여기서 제외한 자들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우둔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원어로 ‘돌같이 굳게 하다’, ‘무디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완악함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합니다. 8-10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여기서 8절의 ‘기록된 바’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신명기 29장 4절과 이사야 29장 10-11절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13:14, 15;막 4:12;눅 8:10;요 12:40). 또 9절은 바울이 다윗이 원수를 향해 저주한 말을 인용한 것인데 시편 69편 21-28절에 있습니다.

    다윗이 적을 저주할 때 ‘밥상’을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밥상은 단지 밥상이라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해 아래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이 누리는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눈만 뜨면 육신적인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세가 되면 노아 홍수 시대와 같이 밥상이 그들의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8,39).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에 치심하면 올무에 덫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의 밥상이 진수성찬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에 두면 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완악해졌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1-12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비록 이스라엘이 완악해져서 넘어졌지만 완전히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이방인의 구원을 불러왔고, 이방인의 구원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도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풍성함을 불러오고 이방인의 풍성함이 이스라엘의 충만함을 불러올 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전부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일이 그냥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이방인의 풍성함과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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