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4차 롬 8:26-30절 20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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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4차 롬 8:26-30절 2021.3.282021-03-28T14:11:0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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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8장 18-25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고난당할 때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비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바울처럼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므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둘째로, 어떻게 장차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고난이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를 주시라는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만 생각하여 낙심하지 말고 곧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 가운데 즐거워해야 합니다.

    셋째로, 왜 바울이 피조물도 우리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을 고대한다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피조물도 저주를 받았듯이 인간의 구원과 피조물의 회복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심판이 우주적으로 행해지듯이 구원도 우주적으로 행해집니다.

    넷째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성은 종말에 이루어지므로 이를 소망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간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한마디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치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사소한 일에 쉽게 무너집니다. 은혜 받고 변화된 것 같지만 쉽게 옛날로 돌아갑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참아야 할 상황에서 절제하지 못해 혈기를 부려서 인간관계를 깹니다. 다윗처럼 성적인 문제로 쉽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돈의 유혹 앞에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평가를 받던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대부분 넘어지는 것도 돈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어떻게기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탄식하며’로 기도하십니다. ‘탄식’은 절박한 상황이나 안타까운 상황에서 절망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동기가 우리의 연약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마태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한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8:17). 제가 저의 연약함을 인하여 절망할 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질병만 짊어지시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정말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듯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으로 여기시고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이를 수식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친히’입니다. 이 단어가 여러분에게 주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성령께서 기도를 자발적으로 하신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님 스스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탄식하며 기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탁하지도 않아도 자발적으로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니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 있어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해도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26절 하반절을 읽습니다. “…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그러자 예수께서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10:38). 무슨 말입니까? 당시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야고보와 요한만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도 그들처럼 기도할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제가 지난번 2030123007000의 비전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우리의 사역을 과시하려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닌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런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런 기도는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어떻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바로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복신앙과 말씀신앙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복신앙은 내 뜻과 생각대로 되는 것을 기뻐하지만 말씀신앙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28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선한 결실을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업에 실패를 했어도, 질병에 걸렸어도, 큰 시험을 당했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유익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이 말씀이 성취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이를 형제들에게 말한 후형제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종살이를 하던 중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씌어져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옥 중에서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총리가 된 후 형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7-8). 무슨 말입니까? 겉으로는 형제들이 자신을 팔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해 자신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려고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조그만 어선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를 않자 온 동네 사람들이 바닷가에 나가서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점 밤은 깊어갔지만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모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한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합심해서 불을 껐습니다. 그런데 불을 끄고 나자 고기 잡으러 나갔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무사히 돌아왔다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불을 낸 아이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돌아온 어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불빛이 보였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결국 무사히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집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실수로 불을 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섭리하셔서 어부들이 그 불을 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바울의 로마 전도여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3차례 전도여행을 하면서 늘 기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세.” 그런데 이 기도가 어떻게 응답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복음 전도자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죄수의 몸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서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겠다고 하자 베스도 총독은 그를 황제에게 재판을 받도록 로마로 보냅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던 중 지중해에서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광풍으로 음식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여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호에 승선했던 자들이 바울이 말한 대로 배가 파손되었어도 목숨을 잃은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서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멜리데 섬에서는 독사 사건을 계기로 그 섬에서 가장 높은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고쳐줌으로 그들이 후한 대접을 받고 로마로 가서 결국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악인이 판을 치는데 침묵하시는지,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지만 고난에서 빨리 구원해 주시지 않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왜’라는 물음은 우리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통치하면 평안하고, 악한 사람이 통치하게 되면 온 세계가 그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때로 소수의 걸출한 인간이 역사를 주도해나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히틀러가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였을 때 이 세상이 그의 손에 있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십니다. 잠시 악인이 세력을 얻고, 불의한 일이 벌어지며, 끔찍한 악이 난무하여도 역사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께서 지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만나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넷째로,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9-30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생애를 인도하시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리 아시고(예지), 미리 정하시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 하셨다(영화)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원의 서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서정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서정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서정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영화롭게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첫째가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되려면 다른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형제 중에서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의 서정에 사용된 동사가 모두 과거 시제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영화’까지도 과거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것은 미래형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형으로 기록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장차 영화로운 몸이 될 것까지 보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요? 이미 영화로운 자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어떤 고난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살아가기에 잠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네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절망하지 말고 기쁨과 소망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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