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3차 로마서 8장 18-25 20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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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3차 로마서 8장 18-25 2021.3.212021-03-21T14:10: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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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8장 12-17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라고 말하기 전,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빚을 지면 갚기 위해서 노력하듯이 우리가 성령님께 빚을 졌다고 생각해야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빚을 갚듯이 우리는 성령께 빚을 졌기에 성령으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13)라고 했는데, 우리가 육신대로 살지만 실제로 죽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분리를 뜻하는 데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므로 영적으로 죽임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육신대로 살면’이라는 동사가 일회적인 동작을 나타내지 않고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육적인 존재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므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셨는데 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난 후 당하는 고난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읽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주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언뜻 보면 주어가 ‘현재의 고난’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했기에 ‘우리’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주 동사는 ‘생각하건대’이기 때문에 주어는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이런 생각을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여기서 나타날이 헬라어로 아포칼립소입니다. 이 말은 ‘계시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의 명사가 ‘아포칼립스’인데 ‘묵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참고로 2016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액스맨 아포칼립스’가 상영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발음은 같지만, 전혀 뜻이 다릅니다. 즉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지금은 숨겨져 있기에 전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나으면 환호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난당한 우리를 위하여 장차 드러내실 영광은 환호만 가져다주지, 실망은 전혀 안겨주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빌립보서 26-11을 읽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를 위해 고난당하면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얻으신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고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비교할 수 없도다입니다. 바울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장래에 나타날 영광을 비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즉 고난당하는 자신과 고난당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자신은 의인인데 고난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악인인데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난당할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다면 이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교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우월감과 열등감은 교만의 속성으로 그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고난당할 때 비교의 내용을 바꿔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지금의 고난과 장차 누릴 영광을 비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아무리 행복한 여건을 갖고 있어도 불행을 느끼지만,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칼빈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다가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만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19-22절을 다시 읽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는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한다’(아페크덱세타이)는 목을 길게 빼고 앞을 쳐다본다는 의미입니다. 즉 피조물도 성도의 영광의 날을 위해서 목을 길게 빼고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천사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존재 즉 영혼이 없는 동식물, 바다와 산, 자연경관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의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이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날을 이렇게 고대할 수 있습니까? 이는 문자 그대로 피조물이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미래에 드러날 영광의 규모와 폭을 설명한 것입니다. 즉 장차 영광이 드러날 때 성도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피조물도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왜 영광의 날에 사람만 아니라 피조물도 새롭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맡겼는데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헛된 일을 행할 때에 피조물들은 헛된 일을 위해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피조물도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들도 저주를 받았을 뿐 아니라 땅도 저주를 받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점점 악하게 죄를 범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탄식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습니다. 1968년, 최초의 우주인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해서 첫 주일 아침에 지상으로 보낸 첫 메시지가 시편 8편 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너무 창조물이 아름다워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지구의 색깔은 청록색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은 별처럼 약간 회색빛을 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구를 다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는데 자연을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을 고대하는 것은 피조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23절을 읽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표준새번역은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도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이라고 번역합니다. 두 번역본 모두 첫 열매를 성령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의’에서 ‘의’를 소유격의 의가 아니라 ‘동격의 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을 받은 우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그냥 우리까지도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 몸의 부활을 포함한 온전한 구속을 보증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완전한 구속의 날, 즉 영광을 맞이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눈에 거슬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자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로마서 8장 15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23절에서 장차 ‘양자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곳저곳에서 장차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이중적 구조 때문입니다. ‘already, but not yet.’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양자의 신분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24을 읽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언뜻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말은 우리가 소망만 가지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소망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구원받았지만, 그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소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세 가지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복음을 믿고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청구권을 사용하므로 삶 속에서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고, 마지막 날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25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완성되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과 인내와 기다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망을 놓치는 순간 인내를 포기하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소망을 가졌기에 인내하고 기다려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은 75세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소망했기에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요셉도 17세에 꿈을 통하여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을 꿈꾸고 소망을 가졌기에 인내했고 기다렸습니다. 13년 동안 시험과 유혹을 물리쳤고 드디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사무엘로부터 15세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 소망을 가졌기에 사울 왕의 갖은 핍박을 참고 견뎠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30세에 왕 위에 올랐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장차 드러날 영광을 바라보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D3전도중심제자훈련의 20303007000비전’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성취된다는 소망을 새삼 갖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금년 10월 터키서 112개국 초청 D3워크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2년 전에 주님께서 원장에게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일이 진행 중이고 그 성취를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D3의 공유와 보충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확산이 이루어질 것이고 본격화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에 유대인 제자훈련을 위한 D3선교센터와 더처치의 건립이 곧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3년 전, 성령께서 텔아비브 공항에서 주님께서 원장에게 유대인들이 나를 거짓 메시아로 알고 있으니 그들에게 내가 메시아라고 가르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서 선교사를 통해 유대인 목회자를 알게 되어 그들을 몇 차례 훈련하였고, 이제 곧 그들을 본격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첫 해외 D3선교센터의 건립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불가피합니다.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시험을 참고 기다리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이 고난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비례합니다. 천국에서의 영광을 고대하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신앙은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듯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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