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2차 로마서 8장 12-17 20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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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8장 1-11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앞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죄의 법에 굴복하는 것으로 인해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낼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말을 할 때는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죄 앞에 무릎을 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마지막 날 무죄 판결을 받기 때문에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방법, 즉 법을 지키거나, 지키지 못할 경우는 대가를 지불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교통법규를 위반할 시 벌금을 내면 법규를 위반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육신을 좇으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육신을 좇지 말고 영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을 스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생각을 가진 자는 영을 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큐티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체크하는 수단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죄에 무릎을 꿇는 현재의 육신만 보고 절망하지 말고, 마지막 날에는 전혀 죄와 상관 없는 몸으로 다시 거듭날 것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는 바로 앞에 나온 내용,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정확히 말하면 성령님께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께 빚을 졌습니까? 앞서 살핀 대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장의 구조를 볼 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이를 말하기 전에 빚진 자로되라는 말을 했을까요? 이는 13절 상반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바울이 ‘빚진 자’라고 한 것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빚을 진 사람은 반드시 갚으려고 합니다. 앞서 살핀 대로 우리는 성령께 빚을 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께 빚진 자라는 것을 알면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 진 빚을 갚는 것입니까? 그것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께 빚진 자라고 생각하고 육신대로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께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솔직히 저부터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떠올리면 주로 능력과 은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성령을 떠올리면 ‘빚진 자’라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영적으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13절을 다시 후반절을 읽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아야 영이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비밀을 알았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인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천국 문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 어거스틴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어거스틴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문지기가 내가 보니 당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없고, 온통 철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어거스틴은 문지기의 말에 놀라서 꿈을 깼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계기로 이렇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 생각하리라.” 그렇습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면 육신대로 살게 되므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13절)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다 죽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을 좇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두 가지로 답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분리를 뜻하는 데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므로 이미 그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지만, 곧 바로 죽지 않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살면’이라는 동사가 일회적인 동작을 나타내지 않고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육신대로 살아갈 때 징계하시고 책망하셔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든 말씀대로 육신대로 살면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육신대로 살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4절을 다시 읽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바울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으므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14절만 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구원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전에는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할 의무는 구원받은 자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15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바울은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은 성령을 뜻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의 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주석가들은 대부분 ‘종의 영’ 역시 성령님을 지칭한다고 해석합니다. 즉 옛 시대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을 따로 분리하여 해석하지 않고,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을 하나로 보고 해석합니다. 즉 성령은 종의 영이 아니고 양자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우리가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말했을까요? 이를 알려면 먼저 입양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입양은 원래는 친 자녀가 아닌데 법률적으로 친부모와 친자식의 관계를 맺는 행위를 뜻합니다. 지금은 국내 입양을 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가계의 대를 잇기 위하여 종종 가까운 친척 집 아들을 데려다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양자로 데려올 경우는 대체로 불행한 환경에 있는 자를 데려옵니다. 즉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렵다거나 아예 신분이 천한 자를 데려옵니다.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양자가 네로 황제입니다. 글라우디우스는 자기의 아들이 아닌 네로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자의 영, 즉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양자의 영, 즉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유대들이 예수님께 그의 신분을 밝히라고 요청하자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10:33).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0:34)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육적인 존재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16절을 읽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영과 더불어’라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고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율법이 한 사람의 증거는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915을 읽습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즉 성령께서 바로 증인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 때 성령께서 “너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야”라고 확신을 시켜준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전설에 의하면 어떤 히브리인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업고 광야를 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그 친구는 당신의 등에 업힌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히브리인은 내 아들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다시 그 아이에게 너를 업고 가는 사람이 너의 아버지시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서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아들에게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너를 업어주지 않았느냐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업어 주면 아버지가 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계속해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시비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얘야, 이분이 나를 통하여 너를 낳으신 너의 아버지이시다라고 말하면 끝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령을 어머니의 영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고난이 연속해서 일어날 때도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이시라고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하고 이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17절 하반절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혹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는데 왜 우리가 또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아주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난 후 당하는 고난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자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당하신 것이고, 후자는 우리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서 받을 상과 영광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을 믿지만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이 땅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비교 불가입니다. 장차 누릴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고 이 땅에서 영을 좇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선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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