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1차 로마서 8장 1-11절 20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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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1차 로마서 8장 1-11절 2021.3.72021-03-07T14:08:1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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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7장-14-25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기독교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칭송을 받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앞에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경력이 화려해도 스스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고난을 당했어도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왜 죄의 법에 굴복하는 것을 인하여는 곤고한 자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사역으로 인한 고통은 사역할 때만 겪게 되지만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으로 겪는 고통은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역은 쉬어도, 죄는 쉬지 않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죄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경험을 했기에 이와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그를 사로잡아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죄의 법이 죄를 짓게 하므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죄와 싸우려 하지 말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1장까지는 교리, 즉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12-16장까지는 실제의 삶, 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 부분에서 9,10,11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리에 대한 언급은 로마서 8장에서 그치게 됩니다. 즉 신앙의 진수인 ‘칭의’의 교리는 로마서 8장에서 거의 끝납니다. 그동안 바울은 로마서 1-7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고,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칭의의 교리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칭의를 받은 자들이 추구해나가야 할 성화의 당위성과 성화의 과정에서 성도들이 겪어야만 하는 영적인 갈등에 대하여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이제 8장에서는 하나님의 정죄하심이 없는 구원과 사랑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8장 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서 ‘정죄함’은 헬라어로 카타크리마라고 하는데 이는 심판의 결과에서 오는 유죄판결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떤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인류의 족보를 크게 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아담의 족보이고, 다른 족보는 둘째 아담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다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족보에서 둘째 아담인 예수의 족보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 족보에서 저 족보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족보를 옮기려면 무엇보다 죄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반드시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죄 문제를 해결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마지막 날 유죄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서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낼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확신했으니 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삼심제를 취하고 있기에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최종적으로 재판이 끝납니다. 그런데 1, 2심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면 기쁨이 하늘을 찌를듯한텐데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죄의 법을 이기지 못해 날마다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지만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서서 심판을 받을 때는 무죄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이 없다면 가장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부연하여 설명합니다. 2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정죄함이 없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사망을 주는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한 마디로 율법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고 왕 노릇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신 후 에는 율법은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신법은 구법을 폐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에 매여서 산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은 넘치는 생명입니다.

    이제 바울은 3-4절에서 율법의 요구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육신으로 연약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육신의 모양, 즉 사람으로 보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율법은 인간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죄를 당하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의 정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통 법규를 위반했다고 합시다. 교통 법규를 위반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벌금을 내면 됩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의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마 5:17).

    영국 교회가 낳은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소년이 새장의 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년에게 다가가 “얘야 너 그 새를 어찌하려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좀 더 괴롭히다가 싫증이 나면 죽여 버리지요.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그러지 말고 그 새를 내게 팔지 않으련?” 그러자 소년은 “백 달러를 주면 팔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냥 농담으로 말한 것입니다. 누가 새 한 마리를 백 달러에 사겠습니까? 그런데 스펄전 목사는 백 달러를 주고 그 새를 샀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그 새장을 들고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를 성도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망과 저주의 새장에 가두고 괴롭히는 마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마귀가 대답합니다.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게 하렵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갖고 놀다가 죽여 버리지요. 뭐.’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되겠느냐?’ 마귀는 웃으면서 ‘이것들을 사서 뭘 하시려고요?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반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래도 사시겠다면 당신의 외아들 예수의 목숨을 내어놓으세요.’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고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사셔서 자유를 주시고 천국을 훨훨 날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내어주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5절 이하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신과 영이라는 두 단어를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바울이 헬라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원론이란 한 체계 안에 본질적인 두 상태 혹은 두 부분이 있고, 이 요소들은 서로 독립적이기에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인데, 바울은 한 사람 안에 영에 속한 부분과 육에 속한 부분이 따로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소속적 존재’, 즉 육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인간을 소속적 존재로 이해하면서 영에 속할 경우와 육신에 속할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6-8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한마디로 영을 좇으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육신을 좇으면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지 말고 영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영을 좇는 것인지, 육을 좇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항상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상대방을 위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그와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만, 정반대인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수난 예고, 즉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마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하자,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말했는데 오히려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7-9).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10).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각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생각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생각이 자기 자신에서 나온 것이면 육을 좇는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면 영을 좇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자신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으로 그 생각을 스캔하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9절부터 11절까지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9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다 같은 것으로 성령을 뜻합니다. 즉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므로 우리가 영에 속해 있고 육신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 말을 합니까? 11절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는 한마디로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 죽을 몸’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우리의 몸에 대해 어떻게 말했습니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구 건져내랴.” 우리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망의 몸도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으로 번역된 헬라어 ‘소마’는 인간이 죽고 나면 썩어버릴 육체를 뜻합니다. 그런데 비록 우리의 몸이 썩어버릴 육체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에 무릎을 꿇는 현재의 육신만 보고 절망하지 말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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