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20차 로마서 7장 14-25절 20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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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0차 로마서 7장 14-25절 2021.2.282021-02-28T14:06: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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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7장-7-13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율법이 곧 죄는 아니지만,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크게 4가지로 언급했습니다. 첫째로, 율법이 내면세계를 드러내어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고, 둘째로, 더욱 죄를 많이 생산하고, 셋째로, 죄의 결과인 죽음을 알게 하고, 넷째로, 죄의 정체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이렇게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가 있기때문에 지나친 ‘율법폐기론자’도 ‘율법주의자’도 되지 말아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율법에 매이지 말고 복음에 매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마음과 죄의 법을 따르려는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음을 소개합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바울은 앞서 13절에서 율법이 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령하다’라고 말합니다. ‘신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속한’이라는 의미로 율법의 기원이 신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신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이 신령하다고 한 후, 곧바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고 말합니다. 죄 아래’라는 말은 죄의 지배와 통치 아래에 있다는 뜻이고, ‘팔렸다’는 동사는 포로나 노예를 팔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즉 그가 율법을 받았지만, 육신에 속해서 죄의 명령에 거부하지 못하고 죄의 종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죄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이 뜨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칭송을 받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과연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5-17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령하지만, 자신의 범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경력이 화려해도 우리 안에 있는 범죄성으로 말미암아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바울처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선을 행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18-20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서 바울은 내 속에 거하는 죄때문에 원치 않는 것을 행한다고 말하면서 ‘내 속’을 ‘내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사릌스(σάρξ)’라고 하는데 이는 단지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달리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육신을 가진 사람은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약해서 쉽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즉 육신은 죄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싶어도 실제로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15-17절 말씀과 18-20절 말씀이 거의 흡사합니다. 특별히 17절과 20절 후반부는 똑같습니다.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래서 바울이 실수로 같은 것을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다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17절에서는 우리의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16절에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18-20절에서는 죄와 육신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합니다. 즉 율법을 갖고 있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육신의 범죄성 때문에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죄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21절부터 23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자기 마음에 두 법이 있어서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그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다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지만 실제로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기 때문에 죄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악을 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다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의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기자는 다윗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통한 사건을 폭로합니다. 다윗 왕이 전쟁에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요압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암몬을 정벌하게 하고, 자신은 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을 하는 밧세바를 본 후 그녀 를 데려다가 동침합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전장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송환하여 밧세바와 동침케 함으로써 자신의 간음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 장군이 전쟁 중이라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그를 최전방에 나가 싸우게 하여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이렇게 범죄하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드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했겠습니까?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법을 떠올리고 물리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그를 사로잡자 결국 죄의 법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개의 법이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안에서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운동에 비유하면 권투가 아니라 레슬링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권투는 떨어져서 싸우지만, 레슬링은 둘이 서로 붙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뒤엉켜서 싸우기 때문에 영적인 레슬링입니다. 우리 안에서 레슬링처럼 치열한 영적 전쟁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느냐, 죄의 법을 따르느냐 중에서 하나를 따를 뿐입니다.

     

    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곤고한’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wretched이다. 이는 ‘몸이 안 좋은’, ‘비참한’, ‘형편없는’, ‘가련한’, ‘불쌍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곤고한 사람’은 비참하고 형편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돌에 맞기도 하고, 태장을 5번이나 맞고, 강도의 위험을 당하고, 시내와 광야의 위험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잠을 못 자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통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곤고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을까요? 그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당하는 고통과 복음 전도를 하면서 당하는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으로 인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역으로 인한 고통은 사역할 때만 겪게 되지만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으로 겪는 고통은 언제나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역은 쉬어도, 죄는 쉬지 않습니다. 죄는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전투에서 때로는 이기기도 하지만 패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인하여 크게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한 자입니다. 특별히 그는 40일간 시내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서 순간 치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하여 돌판을 땅에다 내리쳐서 부서버렸습니다. 과거 자기 동족을 쳐 죽인 혈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범죄하였고, 솔로몬도 범죄하였습니다. 바울도 혈기를 내며 바나바와 다투었습니다. 신앙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왜 혈기를 참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의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이 싸움에서 영원한 승리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25을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 후,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이 사망의 몸을 가진 곤고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건짐받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죄인이라고 설득을 시키고,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합니까? 자신이 죄와 사망과 지옥의 법에 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거기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를 무엇으로 연결하고 있습니까? ‘그런즉’ 이라는 부사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런즉’은 앞 내용으로 미루어 뒤 내용의 근거를 짐작해 낼 수 있을 때 사용하는 연결 부사입니다. 그런데 두 문장은 서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25절을 난해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역본을 찾아보았지만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금주 평택길음교회 사역을 마친 후 돌아와서 다시 이를 고민하던 중 해결했습니다. 그동안 25절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즉’이 25절에서만 두 문장을 연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를 연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런즉’이 24절에서 25절의 앞문장까지와 25절의 뒷문장을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한 것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이고,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한 것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다투고 있기에 때로는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들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바라보면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하여는 절망하지만, 자신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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