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19회 로마서 7장 7-13 20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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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9회 로마서 7장 7-13 2021.7.21.2021-02-24T09:16: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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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7장 1-6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유대인의 결혼제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내가 남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듯이, 우리가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어야 아내가 자유를 얻듯이 율법이 죽어야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죽을 수 없기에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가서’라는 단어가 ‘예수님께 속했다’, ‘결혼했다’라는 의미이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데 실제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율법 아래에서는 사망을 위해서만 열매를 맺었지만, 벗어난 후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죄와 율법의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기 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7)고 말합니다. 왜 바울이 이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앞서 여러 번 죄에서의 해방은 곧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5절, 3:20, 4:15, 5:13, 6:14) 혹 독자들이 죄와 율법을 동일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와 율법은 전혀 다르지는 않습니다.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죄와 율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바울은 이를 크게 4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로, 율법은 내면 세계를 드러내어 죄인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다시 7을 읽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하여 십계명 가운데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그가 왜 다른 계명을 예로 들지 않고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들었을까요? 살인이나 간음 또는 도적질은 인간의 외적인 행위에 대한 계명인데 반하여, 열 번째 계명은 인간의 내적인 마음에 대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행위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죄까지도 드러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악한 본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로, 그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 이방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로, 공동체를 통제하려면 법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올 때 장정만 약 6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오늘날처럼 한두 명만 낳지 않았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최소한 3백 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정한 법이 없다면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둘 외에 또 다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욕심을 통제할 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였기 때문에 배급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해방된 후에는 자유자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가지려는 탐심이 전보다 더 꿈틀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율법의 이런 기능 때문에 탐심이 더 드러나서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율법은 더욱 죄를 많이 생산합니다. 8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바울은 먼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계명으로 말미암아 온갖 탐심이라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이 있어야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 때문에 죄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 탐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을 듣지 못했을 때는 비록 그 계명을 어기고 살았어도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탐심이 드러나서 자신이 죄인임을 크게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실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하고, 즉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여 두 배를 채우자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고서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닫자 죄인인 줄 알고 무릎을 꿇었듯이, 우리가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모르는 것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율법은 죽는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9-11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언뜻 보면 9-11절의 내용은 앞서 살핀 8절의 내용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죄와 율법과 사망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절은 율법 때문에 죄인임을 더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9-11절은 율법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라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 자기가 살았다는 것은 그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계명이 이르매’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게 되어 자신이 죽었고 죄가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깨닫기 전에는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였지만, 이제 율법을 깨닫자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이것을 말할까요? 율법은 우리에게 죽음을 알게 하여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행했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행위를 의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면 마치 자신이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불순종하면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넷째로, 율법은 죄의 정체를 알게 합니다. 12-13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먼저 율법이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과 도덕법과 재판법입니다. 의식법은 성막 제도, 제사들, 절기 등에 관한 법입니다. 이런 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신 후, 즉 신약시대에는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재판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생활에 관한 법들입니다. 그러나 재판법은 신정국가에서 행해진 법이므로 신약시대에는 파기되었습니다. 도덕법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입니다. 십계명이 바로 대표적인 도덕법입니다(출 20, 신 5장). 이 법은 신약시대에도 파기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도덕법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웃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하므로 복을 받게 하므로 바울이 율법을 가리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당대 유대교가 율법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을 긍정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합니다. 즉 율법을 통하여 죄가 살아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율법이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다준 것은 율법이 아니고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어긴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악독한지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바울이 앞에서는 율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율법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자’도 되지 말고, 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도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복음을 믿게 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지,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1인칭 대명사 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바울은 7절 하반절부터 갑자기 1인칭 대명사 ‘나’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나’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인의 심리적인 갈등을 말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나 종교개혁자 루터, 칼빈 뿐만 아니라, 칼 바르트와 같은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나’는 심리적으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나 혹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아담-인간의 갈등을 말한 것입니다.

    둘째로, ‘를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 자신으로 보려는 해석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을 바울의 과거에 대한 자전적인 회상으로 봅니다(W. G. Kümmel). 그런데 이처럼 로마서 7장을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자전적으로 고백한 것이라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 예수를 만나기 전, 유대교인이었을 때 내면적으로 깊은 고뇌와 분열을 겪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에 대해 내면적인 갈등이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를 어떤 특정 인물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바울을 포함해서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바울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실을 표명할 때 이미 자주 1인칭 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구약 성경에서도 일반적인 사실을 표현할 때 1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사 12:1-2; 40:27; 49:14, 21; 렘 10:19-20; 애 1:19-22; 3:1-21; 미 7:7-10, 고전 13), 셋째로, 우리도 일반적인 사실을 말할 때 1인칭 단수인 “나” 혹은 복수인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왜 바울이 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처럼 모든 사람이 율법을 좇아 사망의 열매를 맺지 않고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정점에서 복음의 정점으로 자리를 옮긴 자입니다. 바울만큼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도 없고,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자도 없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죄에 대해,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였고,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로 삶 속에서 죄와 율법의 공격을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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