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16차 롬 6:15-23 2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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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6차 롬 6:15-23 2021.2.72021-02-07T13:47:5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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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6장 1-14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자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례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함의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 않도록 예수께서 대신 일하시지 않는 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은혜의 법이 아니라 종두득두의 법칙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아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지체 중 어느 하나라도 죄를 짓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이 어느 하나라도 죄를 범하는 데 쓰이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여전히 죽지 않고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만 하고 그것을 삶 속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지만 말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안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짓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따라서 죄짓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소유냐 삶이냐’(To be or To have)의 저자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독일 국민들이 왜 혁명을 통해 쟁취한 바이마르공화국을 포기하고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자유 대신 복종을 스스로 선택했는지를 연구한 것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사람들이 선택과 책임이 따르는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파시즘 속으로 도피했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원하는 자유를 얻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과거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출애굽 사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지만 광야 40년 동안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며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15을 보십시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이 말을 합니까?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자유에서 ‘자’는 스스로 ‘자’이고, ‘유’는 말미암을 ‘유’입니다. 즉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의 종노릇을 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마귀의 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전처럼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은 죄를 짓지 않아야 할 책임적 존재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현상을 16절 이하에서 의의 종과 죄의 종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16절을 읽습니다.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주종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즉 순종하는 대상은 주인이 되고, 순종하는 자는 종이 됩니다. 그리고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고, 의에 순종하면 의의 종이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요? 단지 이런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는데 죄를 범하여 다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의 종이 되기도 하고 죄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다른 상태가 없듯이, 죄의 종과 의의 종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을 선택하지 말고 의의 종을 선택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24:15).

    사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이 이 세상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차피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다 지나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이 이 세상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도 미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사느냐, 의의 종으로 사느냐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단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입니다. 따라서 죄의 종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의의 종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17-18을 읽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무엇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로마교회 성도들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까?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즉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순종했다는 말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수고하고 애써서 의의 종이 되었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히 죄와 사망의 굴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수고도 하지 않고 단지 복음을 믿음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가 자신이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감사한 것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일로 감사하지 않고 로마교회 성도들이 의롭게 된 일로 감사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의 감사의 내용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무슨 일로 감사합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함에도 감사, 제로 감사, 전천후 감사를 가르칩니다. 감사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감사의 수준으로 영적인 수준으로 감사로 옮겨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로 감사합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로 인하여 감사합니까? 아니면 자기 밖에서 일어난 일로 감사합니까? 저는 지난 금요일 너무 감사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터키 이승복 선교사로부터 7번째 평신도 사역자를 임명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뛸 듯이 기뻤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터키는 테러가 자행되는 곳입니다. 2007년 말라티야에서 일어난 순교 사건도 터키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개종하기 힘든 곳이 바로 터키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훈련을 받고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고 일곱 명이나 D3로 평신도 사역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1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바울은 전에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던 것같이 그들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의에게 종으로 내주라고 말하기 전, 과거에 그들이 그들의 몸을 부정과 불법에 내주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바울이 당시 이 편지를 쓸 때 얼마나 죄악이 관영했는지를 말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치 않는 아기, 특히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내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광장에는 내던져진 어린아이들로 즐비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아기들을 데려갔는지 아십니까? 매춘을 경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광장에서 주워온 아기들을 키워서 다시 창녀로 일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버려졌던 도시에서 창녀로 생활하면서 때때로 그들의 아버지를 만나 성 관계를 맺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놓은 죄의 올무에 매여 죄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의 올무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있습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왜 그럴까요? 법적으로는 의의 종이 되었지만 실제로 의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의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인이 대가를 지불하고 쟁취해야 합니다. ‘의의 종에게 내주어’에서 ‘내주어’를 NIV에서는 offer로, KJV에서는 yiel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을 단지 의에게 종으로 ‘드리는’ 것으로는 의의 종이 될 수 없고 ‘굴복시켜야’ 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하여 의에게 종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은 과거로 족해야 합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서 의의 종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20-2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살았을 때와 의의 종이 되었을 때를 비교하여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갈 때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고,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는 영생을 누리므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22절에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맺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된 자는 거룩하게 살 수밖에 없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지 않아도 의롭다고 하셨듯이 거룩하게 살지 않아도 거룩함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셨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악한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비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죽음과 무관한 생명, 즉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단지 그런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영생은 새 생명으로 ‘예수 생명’입니다. 예수 생명이란 예수께서 갖고 계신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갖고 있기에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이중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마귀가 지배하게 할 수도 있고 성령께서 지배하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귀처럼 추악해질 수 있습니다. 지킬 박사가 될 수도 있고, 하이드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기는 틀렸습니다. 이제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의의 종이 되었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열매로 영원한 나라의 삶이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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