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제45차 로마서 15장 30-33절 202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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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제45차 로마서 15장 30-33절 2021. 9. 122021-09-12T08:16:2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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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522-29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지금 있는 지방에 일한 곳이 없기 때문에 서바나로 간다고 했는데 이를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것은 1년 6개월입니다(행 18:11). 1년 6개월이면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헬라 전역에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이미 그곳에 세워진 제자들을 통하여 전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로마를 가기 전, 굳이 예루살렘교회를 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의 출발지이고 종착점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무시하는 것은 곧 모든 교회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권위를 세우셨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과 교제를 원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나누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성경을 통하여 나누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가 이를 깨달아야 서바나 전도 여행에 협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은혜를 받았다면 이를 반드시 갚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받은 것에서 멈추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헌금 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에서 말씀을 나눔으로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연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에 똑같이 사용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돕거나, 선교사의 필요를 채워주거나, 말씀 사역자를 돕는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6:40)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뜻입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확증한 후 서바나로 가겠다고 했는데 과연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갔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앞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로 간다고 했는데 예루살렘과 로마에 갔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는데, 자신을 이방인 선교사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서바나를 땅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네 곳 중 ‘땅끝까지’를 제외하면 모두 이스라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로마교회에 가겠다고 말한 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를 통하여 온 땅에 하나님의 복을 전달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나르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 써 내려가면서 갑자기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30을 다시 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바울은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이 문장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바로 συναγωνίσασθαί”(쉬나고니사스싸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라는 전치사와 ‘투쟁하다’라는 동사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즉 ‘함께 투쟁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는데 원래 레슬링 선수나 또는 복싱 선수가 운동 경기, 특히 체조 경기에서 서로 싸운다는 개념입니다. 즉 바울이 운동 경기에서 한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함께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자신이 싸우는 일에 그들이 함께해 주기를 강력히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로마교회에 이와 같은 기도를 부탁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하신 것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어 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26:38). 예수께서는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 매우 절박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도 위기의 상황을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기도를 잘 부탁하지 않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기도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8확신으로 이겼다의 기도응답을 확신하라에서 전통적인 기도의 정의, 즉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영혼의 호흡이라는 것외에 새로운 정의를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영적전쟁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권리다, 셋째는 사역이다. 제가 왜 기도의 새로운 정의 중에 ‘영적전쟁’을 포함했을까요?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무슨 전쟁이든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요청하시고 바울도 기도를 요청했는데 우리가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바울이 힘을 같이하여 기도해 달라고 간청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크게 세 가지입니다. 31절 상반절입니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첫째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도록부탁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은 복음에 대적하는 유대인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전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행 9:29, 30), 지금도 여전히 그를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적에서 건짐 받기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케 하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죽이려고 했지만(30절) 천부장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 20:24)고 말했는데 본문은 마치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기도를 부탁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음이 두려워서 이런 기도를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비신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희생을 당해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무의미한 일로 시간과 물질을 소비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기도를 부탁한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31절 후반절을 읽습니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여기서 ‘섬기는 일’은 25절에서 말한 “성도를 섬기는 일”을 가리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이 모금한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 유대인 성도들 중 가난한 자들(26절)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 유대인 성도들을 위해 마련한 구제 헌금을 그들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뭐 이런 일까지 함께 기도해 달라고 기도를 요청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돈을 주는 자가 상대방이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기도를 부탁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와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문제를 안건으로 내놓자,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확정을 지었습니다(행 15:19-29). 그래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바울과 이방인 교회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15:5). 둘째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과 관련하여 거짓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21:20, 21). 즉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헛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만 말하라면 ‘은혜’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는 썩어 없어질 것을 구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를 구해야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아야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아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바울이 기도를 부탁한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32을 보십시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하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섬기는 일을 무사히 마치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로마 성도들에게 기쁨으로 나아가 그들과 함께 편히 쉬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편히 쉬게’하라는 말은 단지 육체적으로 휴식을 취하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 한 것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나 신령한 은사인 복음을 나눔으로 피차 안위를 얻는 것입니다(11-12절). 즉 그리스도인의 쉼은 말씀의 교제를 통하여 피차 말씀으로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심령이 말씀교제로 인하여 쉼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그들에게 나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으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어야 하고,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리고 기쁨가운데 하는 것인지,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얼마든지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굳이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 ‘평강’을 붙이는 것은 원래 일종의 유대교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 특히 축도를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16:20; 고후 13:11; 빌 4:9; 살전 5:23; 살후 3:16).

    그러나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평강의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역 현장에서 대적자들의 공격을 받아 두려움 가운데 처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이 서신을 썼던 고린도에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했습니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평강의 하나님을 로마의 성도들도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 모든 사람과 함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가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15장이 로마서의 끝이고, 16장은 추후 삽입된 독립된 서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 절의 ‘아멘’은 기도의 끝에 따라오는 당시의 전통적인 축복 양식의 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즉 바울이 지금까지 로마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한 내용이 그대로 성취될 줄을 믿고 기도한 것이 그대로 이루질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다수설에 동의합니다. 이는 33절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33절에 ‘계실지어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기도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으로 번역하고 있기에 기도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지금 아멘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곧 응답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날마다 하루에 두 번씩 여러분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확신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대로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 함께 하신다”는 기도가 응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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