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9) 로마서 3장 19-31절 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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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9) 로마서 3장 19-31절 2020.12.20.2020-12-20T10:03:5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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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로마서 3장 9-18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하는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모두 교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교만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를 알면서 왜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할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셋째로, 바울이 말이 나오는 통로를 몸 안에서부터 언급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마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쌓은 것을 밖으로 내놓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말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통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이미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평강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평강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것인데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은혜의 통로가 차단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자백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왜 갈수록 높은 도덕과 윤리를 요구하는데 세상은 점점 죄악으로 창궐해지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항상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주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밝혔기에 이제는 죄인이 어떻게 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논합니다. 성경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득의’ 또는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칭의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실제로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실제로 의인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신자를 쉽게 정죄하는 것은 ‘칭의’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칭의를 말하기 전, 율법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9-20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깨달음이니라’는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데 이는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즉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가리키는 ‘그노시스’가 아니라 개인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죄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다가 율법을 통해서 실제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서라고 불리는 토라에는 613가지 계명이 있는데 그중에 작위 계명은 248개이고 부작위 계명은 365개입니다. 이 중에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어떻게 계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죄인이라는 것과 심판받을 자라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의 대상자라는 것을 알게 할 뿐,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21-22을 읽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구약성경이 이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창 15:6; 단 9:24; 합 2:4). 즉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고 신약시대에는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율법을 지킴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22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지위와 신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를 형제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주체와 결과만 말하고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믿음의 강도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을 크게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순종의 믿음입니다. 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셋째로, 은사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로 가지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짐으로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 순종의 믿음과 은사적인 믿음이 없어도 복음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언급하면서 인간이 처한 상황과 구속의 방법을 설명합니다. 23-24을 읽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바울은 다시 한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였다’는 헬라어로 ‘하마르타노’라고 하는데 이는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피조된 인간의 원 상태를 뜻하고, ‘이르지 못하더니’는 부족과 결핍을 뜻합니다. 즉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드셨는데 그 지위를 상실하여 하나님께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량해 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죄를 크게 지었을 경우 직접 가서 용서를 빌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때 중간에 있는 사람이 주선해서 화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감당하시므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25-26을 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은 하나님도 의롭게 되시고 우리도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이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 큰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잘 안다고 그를 두둔하여 죄인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똑같이 불의한 자가 됩니다. 반면에 제가 그를 잘 알아도 죄인이라고 하고 제가 그에 상응하는 희생을 치룬다면 그도 의롭고 저도 의롭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도 의롭게 되고 하나님도 의로우신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법대로 행하는 것도 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벌금을 내는 것도 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운전 중 신호위반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호위반에 대한 벌금을 내면 신호위반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시지 않고 의인이라고 하셔도 불의하시지 않고 의로우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27-31절에서 칭의의 필연적 결과를 설명합니다. 첫째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랑합니다.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성공의 적, 교만’에서 밝혔듯이 모든 사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과 교만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없으면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를 들먹여서 자랑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충 생각하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하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를 살피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빛 앞에 서 보십시오. 빛에서 멀리 있을 때는 자신의 그림자는 작습니다. 그러나 점점 빛에 가까울수록 자신 뒤의 그림자는 커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멀리 있을 때는 우리의 죄가 적게 보여서 자랑하지만,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우리의 죄가 크게 보여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과 친밀히 교제할수록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28-30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께서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구원의 방법을 준비해두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엡 2:8)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 이외의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율법을 굳게 한다는 것입니다. 31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렇게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하니까 혹자는 율법의 무용성을 주장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도리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은 율법을 대표합니다. 십계명 중에서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될 계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동기를 바꿔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율법 중에는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될 것도 있습니다. 율법은 크게 제사법, 의식법, 도덕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와 의식은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이 되셨기에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히 9:10). 즉 신약시대에는 모세의 율법대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 22:40).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의로운 행실로 구원받지 않고 복음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이라고 불러주셨기에 겸손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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