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43차 로마서 15장 14-21절 2021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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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43차 로마서 15장 14-21절 2021년 8월 29일2021-08-29T14:26:4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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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5장 1-13절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마땅히’라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듯이 강한 자는 반드시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낮아짐과 희생을 상징하므로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낮아지고 희생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서로 받아야 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시편과 율법과 선지서’를 인용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시편과 율법과 선지서’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즉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비판하지 말고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나가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14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그들의 마음이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를 살펴보았듯이 방금 전까지 로마교회 안에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책망하면서 서로 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책망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그것은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일정한 기준을 갖고 사안 별로 다르게 평가해야지, 선글라스를 끼고 동일하게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끼고 있는 안경으로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편견’이라고 합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끼면 사안 별로 문제를 개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객관성을 잃게 됩니다. 왜 우리 사회가 이토록 극좌와 극우로 분열되어 있습니까? 이념이라는 안경을 끼고 사건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종교보다 강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편견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규범’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해서 판단을 한다고 무조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편견으로 보지 말고 성령의 감동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 같은 성경을 읽고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이 나오고 기독교 이단들이 즐비합니까? 왜 전광훈 목사가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성경의 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합니까? 성경을 편견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기 전에 자신의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어제까지는 나쁘게 생각했어도 오늘은 좋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편견을 버리는 훈련을 날마다 하지 않으면 대인관계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화목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첫 단추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면서 로마서를 쓴 동기를 밝힙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5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쓴 이유를 그들로 하여금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는 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15절과 16절에서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일꾼이 되어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그가 쓴 편지마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곳이 고린도전서 15:8-10절입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즉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려고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세계 복음화와 유대인 전도의 사명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은혜를 앞세우고 사역했듯이 우리도 은혜를 앞세우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은혜보다는 자기의 의를 앞세워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세 가지 사항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비판적인 자세를 가집니다. 둘째로,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셋째로,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해당되는 것이 몇 개입니까? 한두 개 이상은 다 해당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혜보다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보다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은 교만하다는 증거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울은 복음의 제사장으로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17-19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편만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일루리곤’은 발칸반도 중서부 지역으로 지금의 ‘알바니아 지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복음을 전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바울과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지금껏 수십 국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18후반절-19절을 다시 읽습니다. “…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말씀으로만 전하지 않고 행동과 놀라운 기적과 성령의 능력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으로만 복음을 전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야 합니다. 제가 평소 제자훈련사역이 곧 성령사역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현장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전할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까? ‘3분복음메시지’를 무한 반복하면 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능력있게 사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재정이 허락하는 대로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대형전도집회를 열어서 원장님과 백승호 집사님 등 평신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무엇을 하지 않기로 힘썼다고 말합니까? 20절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복음을 들었던 사람보다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을 중심으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로마서 1장 15절을 읽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 바울은 이미 구원받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고 말한 것은 복음의 방향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동기성을 말한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이 전도한 사람을 가로채려고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한국교회에 유행하던 단어가 있습니다. ‘양 도둑질’입니다. 제가 분당에서 목회할 때 경험한 일입니다. 대형교회들이 물량 공세를 앞세워 개척교회의 성도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어떤 교회는 대형버스를 운행하여 보란 듯이 개척교회 앞에서 성도들을 태워 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번영신학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회만 커지면 되고 다른 교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교회에 있는 성도가 대형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존 신자가 아니라 아직 믿지 않거나 믿다가 낙심해서 안 다니는 자들을 전도 대상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1절입니다.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이사야 52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힘쓴 것은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사역해도 성경의 정신과 먼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성경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제가 왜 ‘D3전도중심제자훈련’을 창안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습니까? 저는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전도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께서 전도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면 가장 효과적인지를 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주님께 여쭸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자훈련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법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4복음서 모두 전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만 전도하라고 하지 않고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던 중 마태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사람을 로봇으로 사용하시지 않고 그의 성정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리는 다른 사람보다 계산이 빠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빠르게 전도할 수 방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독 마태만 제자훈련을 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의 교과목이 무엇입니까? 이를 마태만 이야기 합니다(마 4:23; 9:35). 세 가지 사역, 즉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훈련해서 복음을 전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왜 제자 삼아서 전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그것은 배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사람만 제자를 삼는다고 합시다. 이 일에 열 명만 참여한다고 합시다. 내년이면 몇 명이 됩니까? 20명입니다. 그분들이 한 명씩만 제자 삼아서 같이 전도하면, 그다음 해에는 몇 명이 됩니까? 40명입니다. 그다음 해는 80명입니다. 그 다음 해에는 160명이 됩니다. 그 다음 해는 320명이 됩니다. 그다음 해에는 640명이 됩니다. 그다음 해에는 1,280명 입니다. 사상이든, 물건이든, 복음이든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은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제자훈련을 하신 것이고,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를 깨닫고 D3전도중심제자훈련을 창안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인 이방인을 주님께 드리기를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단 한 명이라도 주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 한 명이라도 전도해서 제자를 삼든지, 기존 신자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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