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42차 로마서 15장 1-13절 2021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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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42차 로마서 15장 1-13절 2021년 8월 22일2021-08-28T11:28:0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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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4장 13-23절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라고 말한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의든 아니든 상대방을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이타주의적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는 성육신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 무관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성경적으로 음식을 먹어도 되지만 그것이 비방을 받는다면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음식 문제로 형제와의 다툼으로 관계가 깨어지고, 기쁨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상대방을 배려해서 믿음을 절제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방향에 따라 다르게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나 견고해야 하고, 사람을 향해서는 수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쉽게 무너지고, 사소한 것을 양보하지 못해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바울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을 모두 죄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간단히 요약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 삼지 않으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15장 13절로 끝나고, 14절부터는 부록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선교계획과 기타 문안 인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로마서 강해를 여기서 마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늘도 14장에 이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용납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다시 1절을 읽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마땅히’입니다. ‘마땅히’는 헬라어로 ‘오페일로멘’이라고 하는데 이는 의무나 책임을 뜻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듯이 강한 자는 반드시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돌보아야 하는데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로서 자격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강한 믿음을 가진 자가 약한 자를 돌보지 않으면 믿음이 강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이 강하냐 아니냐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도가 아니라 약한 자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믿음이 강한 것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하나님께만 헌신하면 믿음이 강한 줄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2절을 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바울은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그런데 이 말이 가슴에 확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번역본 중에서 공동번역이 비교적 쉽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의 이익을 도모하여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즉 ‘선을 이룬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이고, ‘덕을 세운다는 것은 ‘믿음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이웃의 이익을 도모하고 상대방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근거를 어디에 두었습니까? 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다윗이 고백한 구약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 문장과 시편 69편 9절이 쉽게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공동번역을 찾아보았더니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라는 성서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비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예수님을 자신을 기쁘시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용하지 말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4-6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바울은 4절에서 왜 성경을 기록했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갖도록 교훈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하나님을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인내하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본받으면 될까요? 7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말로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낮아짐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우리도 낮아지고 희생을 해야 상대방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감정충돌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단의 공격도 있었고, 신학적 논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뜻을 같이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서로 낮아지고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다투다가 서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바울이 복음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바나바에게 2차 여행을 하자고 하자,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마가 요한이 밤빌리아 버가에서 중도에 집으로 돌아간 것을 트집 삼아 절대로 그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며 심히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였고, 바나바는 마가요한과 함께 구브로로 향하였습니다. 바울은 앞으로 마가 요한을 보지 않을 생각으로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바울이 심히 다투고 갈라졌는데, 나중에는 마가 요한을 데려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가 다투고 헤어진 후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인내한 것을 읽으면서 마가요한에 대한 인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잘못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실 자신도 하나님께서 인내하시지 않고 심판하셨다면 이미 세상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인내하셨듯이 자신도 다른 사람에 대해 인내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복음을 전하던 중 고난을 당하면서 마음이 낮아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당시 마음이 높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마음이 낮아졌을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혼자서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겸손해지면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대계명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것입니다. 대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동역자인 마가 요한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불성설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마가 요한을 다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받으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9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예수께서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수종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 사랑하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창조하신 것은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이방인은 이방인 나름대로 유대인을 적대시 하였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경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두를 받으셨기에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는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확증하기 위하여 9-12절에서 구약 성경에 미리 예언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모두 4개인데 한 곳에서만 인용하지 않고, 첫 번째와 세 번째 구절은 시편에서 인용하고, 두 번째 구절은 율법에서 인용하고, 네 번째 인용 구절은 선지서에서 인용했습니다. 율법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의 성경인 타나크의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흐르는 사상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서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4개의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자기 마음대로 배열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인용 구절인 9절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내‘는 다윗으로 유대인을 가리키고, 열방은 이방을 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이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용 구절인 10절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방들은 이방인을 뜻하고, 주의 백성은 유대인을 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용 구절인 11절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여기서 ‘모든’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이방인과 모든 유대인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인용 구절인 12절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여기서 이새의 뿌리로 열방을 다스리기 위한 일어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치하실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셔서 그들을 통치하시고 모두로부터 찬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분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서로 용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는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입니다.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지금껏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약한 자는 강한자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믿음은 단지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용되어진 믿음을 가리킵니다.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강한 믿음이 사람에게 사랑으로 적용되어야 서로 하나가 되어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므로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해 왔습니다. 즉 주일성수를 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믿음이 좋다. 믿음이 강하다고 이해해왔습니다. 물론 강한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한 믿음이 거기거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강한 믿음은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두 가지 방향으로 제대로 작동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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