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28차 로마서 10장 14-21 20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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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28차 로마서 10장 14-21 2021.5.162021-05-16T20:00:5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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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10장 1-13절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주의 재림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으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대인 제자훈련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방향입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회만 나면 자기의 의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날마다 이를 체크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주로 시인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는 것이 밝혀지면 핍박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지 혼자 마음 속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누구든지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자기 마음대로 전도 대상자를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자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구원은 율법을 행하므로 얻을 수 없고 복음을 믿음으로 얻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뭔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구원받기가 쉬운데 왜 구원받는 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14-15을 다시 읽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주님을 부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않는 것은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고,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은 이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전파하지 않는 것은 보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왜 구원받는 자들이 많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점점 믿는 자들이 줄고 교회가 침체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큰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마 6:21)고 말씀하셨듯이 믿음이 없으면 헌금을 드릴 수 없는데, 우리는 십일조는 기본이고, 매주 가족수 대로 주일헌금을 드리고, 매달 선교헌금과 각종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대부분 10의 2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을 드리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입니다.

    그 이유를 찾아내고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5절 상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복음 전도를 가장 우선적인 사명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가 삶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전도가 우리의 존재적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사업장을 주신 것도 다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정, 직장, 사업장에서 복음을 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과거 못 살던 시절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면 교회에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살기 때문에 성공 복음을 전해서는 먹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돈이 있으면 달나라로 여행을 가는 시대입니다. 돈을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믿으라면 콧방귀를 뀝니다.

    그러나 지금도 복음 전도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비신자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감동을 주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과 다르게 살 때 관심을 갖고 감동을 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성령충만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3분복음메시지’를 반복하면 됩니다. 왜 3분복음메시지를 반복하면 성령충만할 수 있을까요? 3분복음메시지의 핵심은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3분복음메시지에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이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3분복음메시지를 계속 반복하면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곧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분복음메시지를 반복하면 자신도 모르게 성령충만해지므로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그들과 다름을 깨닫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10여 전에 강원희 선교사의 삶을 다룬 다큐 영화 소명 3’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데 한국전쟁으로 1·4 후퇴 때 피란해서 전쟁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평생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고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특별히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틈만 나면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병원 개업 후 환자가 많아서 돈과 명예를 얻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허전했습니다. 5년 동안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생선의 머리도 꼬리도 아닌 가운데 한 토막이 가장 귀하듯,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며 48세에 병원을 정리하고 의료 선교사로 나섰습니다. 그는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를 거쳐 다시 네팔로 돌아와서 90을 바라보지만, 왕진 가방을 둘러메고,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며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말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소명은 시작됐다.”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사명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인 교회 역시 이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남으로 시작되었다는 설입니다. 전자가 다수설입니다. 과거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시 전,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한 자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는 교회에 주신 가장 우선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무엇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습니까? 예배입니다. 물론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린 것으로 주일성수를 했다고 자위하지 말고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업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 전도 사명을 받았기에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15을 다시 읽습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27을 인용한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본문에는 ‘좋은 소식’이 두 번 등장합니다.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모두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고 합시다. 집이 있는 사람은 좋아도 집이 없는 사람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하여 발을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 것이고,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발은 온갖 곳을 두루 다니기 때문에 더러움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발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실수로 돌멩이를 차다가 골절을 입거나, 화가 난다고 발길질해서 형사처벌을 받거나, 죄의 유혹으로 그릇 가는 발이 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복음을 들었지만 다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하면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절하거가 심지어 무시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전도하다가 거절당할 경우 쉽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복음을 전하면 단지 무시당하거나 거절을 당했지만, 앞으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형사처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차별 금지법이 시행되기 전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를 말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17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냥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일까요? 한마디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들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지 못해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미 말씀이 온 땅에 퍼졌고 땅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다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가 예수님이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모세의 글과 시편과 선지자의 글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자 어떻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9-21입니다.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19절에 모세가 말한 것은 신명기 3221을 인용한 것이고, 20-21절에 이사야가 말한 것은 이사야 651-2을 인용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불순종하자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이미 모세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세이 일어날 일을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21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종일 그들에게 손을 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가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잘못해서 두 손 들고 벌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기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저절로 내려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온종일 팔을 벌리고 계셨다는 것은 고통을 참아가시면서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완악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말씀하셨지만 이를 듣지 않았고 도리어 전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완악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계속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계속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지만 기회만 나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예배당 안에서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불순종하자 하나님께서 구원이 이방인에게 옮기겼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 늦어지기 전, 말씀에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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